일단 머리에 때려 박아라

by 브로콜리

프릴리미너리를 무사히 마쳤다.

"김 박사, 축하해!"

겨우 프릴리미너리만 끝났는데 회사 동료와 상사분들은 벌써 축하한다. 아직 박사도 아닌데 박사라는 호칭을 쓰면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제 겨우 예비발표 끝난 거라서 아직 졸업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속으로는 무조건 다음 학기에 최종발표를 해서 졸업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프릴리미너리만 끝난 상황이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마치 이제 다 끝난 듯 축하해 주니 부담스러웠다. 무언가 하나만 스텝이 꼬여버리면 졸업은 금방 뒤로 미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담 갖지 말고, 경거망동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계속하자.'

그렇게 꾸준히 혼자 주문을 외우듯 다짐했다.


여전히 막힌 세 번째 논문


프릴리미너리는 무사히 끝났지만 세 번째 논문 관련 연구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새로운 수학적 모델 만들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핵심 논문을 몇 번을 읽어봤지만 너무 길고 복잡해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중국의 한 연구원이 유사한 모델링을 해서 아주 높은 저널에 출판해 뒀다. 그 논문을 태블릿으로 보다가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아서 인쇄를 해서 하나하나 따라서 수식을 세워봤다.

내 연구 분야에 다른 새로운 전공 분야 모델링을 도입하는 과정이라 어려웠다. 내 지식은 관련 분야 학부 과정 전공 수업이 다였다. 하지만 이 논문에 나온 부분은 이미 학부 수준 내용이 아니었다. 대학원, 그것도 그 분야 박사과정 정도는 되어야 배우는 내용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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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함정


논문을 보다가 '이건 왜 이렇게 되는 거지?' 하고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그럴 때는 인터넷을 통해서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학부 과정 등 전공 수업에서도 교수님 설명을 듣다가 '저건 왜 그렇지?' 생각하다가 핵심을 놓치고 수업을 못 따라간 적이 많았다. 그런 과정이 연구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깊이 파고드는 것은 좋은 능력이다. 하지만 지금은 학위 취득을 위해 정해진 일정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완벽한 이해와 적시 완료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프릴리미너리 후에도 두 달 정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도 밥도 안 되겠는걸?'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전략 변경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내용, 분야 이해보다는 적용을 목표로 하자. 완벽보다는 일단 완료를 목표로 하자.'

그리고 수학적 모델을 위한 핵심 내용을 무작정 A4 용지에 적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순서를 정리하고 무작정 내 연구에 적용했다.

어찌어찌 적용하니 무언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떻게 수정해야 될지 보이기 시작했다.

선 적용, 후 이해. 일단 닥치는 대로 시작하니 시간이 지나자 이해가 되었다.

문득 예전에 저명한 교수님이 하셨던 말이 기억났다.

"이해가 안 되면 일단 무조건 머리에 때려 박아두고 나중에 이해하면 됩니다."

정확히 '때려 박아 넣으라'라고 하셨던 게 기억났다.

세계적인 석학이신 분도 그런 방법으로 연구를 하셨다 생각하니 내가 하는 방법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자 점점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내용이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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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는 항상 "잘되고 있습니다"


가끔 지도교수님을 뵐 때면 "그래, 논문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라고 여쭤보셨다.

지지부진한 진도를 말씀드릴 수 없었다.

학생 졸업에 거의 모든 권한을 쥐고 계시는 지도교수님께 힘들다고 현실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자칫 교수님이 '아직 졸업할 시점이 아닌 거 같은데 몇 년 더 해야겠는걸'이라 생각하면 낭패다.

다 준비되었고 박사학위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을 줘야만 했다. 그런 느낌이 평소에 들게 해야 한다. 방심하면 안 된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거의 다 되어 가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머리에 내용을 때려 박고 무작정 적용'하기 시작하니 이제 정말 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던 지라 내용이 나오기 시작하자 논문 작성과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다.

세 번째 논문을 투고하고 학위논문 심사를 받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덧 예비발표 후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었다. 내년 2월에 졸업하려면 12월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학과 행정실에 졸업을 위한 일정을 미리 체크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모든 준비를 시작했다.

교수님을 찾아뵙고 세 번째 논문을 투고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첫 논문 이후 교수님은 논문 투고에 대해 그렇게 까다롭게 점검하지 않으셨다.

"교수님, 세 번째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수요일 날 실험실에서 보자."

교수님과 미팅 일정을 잡고 논문을 출력해서 찾아뵈었다.

"그래,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 봐."

교수님은 논문을 보시고 내 설명을 들어보시고는 말씀하셨다.

"그래, 어디 투고할 거냐?"

연구 내용과 논문에 대한 평가는 더는 없으셨고 연구를 전적으로 믿어 주셨다.

"XXX 저널에 내보면 어떨까 합니다."

(첫 논문을 출판한 저널. 그리고 첫 리젝을 받았던 저널)

"그래, 한번 내보자."

교수님은 잠시 침묵하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리고 세 번째 논문도 작성했으니 이제 졸업 준비해야지."

"네?"

"논문 출판될 때까지 기다리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니 미리 준비해서 출판될 때쯤 졸업할 수 있게 해 보자."

교수님은 논문 투고 승인뿐 아니라 졸업도 준비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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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학교를 다니면서 '괴수' 지도교수분들에 대해 많이 들었다. 학생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교수, "그거 증명해 봐"라며 발표 현장에서 무안을 주는 교수, 금품을 요구하는 교수... 현시대에는 그런 교수들이 거의 없다고 믿지만, 예전에는 그런 분이 너무 많았던 거 같다.

다행히 내 지도교수님은 실용주의자셨고 졸업을 미끼로 학생을 괴롭히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졸업 기준은 나에게는 다소 높고 힘들었지만, 그 기준만 충족하면 교수님은 더 바라는 거 없이 졸업을 승인해 주시는 분이셨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너무 매정하고 기준이 높아 힘들었지만, 차츰 그 기준을 모두 충족할 시점이 오니 실력만 되면 졸업을 시켜주시는 지도교수님이 한없이 감사했다. 그 실적이 내 이력에 도움 되는 건 덤이다.

좋은 지도교수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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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연구를 뚫는 3단계


1단계: 이해 포기

"완벽히 이해하려다 시간만 간다" → 일단 받아들이기


2단계: 무작정 적용

"A4에 순서대로 정리" → 내 연구에 때려 박기


3단계: 결과로 이해

"결과가 나오면 이해가 따라온다" → 선 적용, 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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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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