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호로고루성
더 근사한 일몰을 보러 파주에서 연천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호로고루'라는 독특한 이름과 사진 한 장이 머릿속에 박혀 있던 어느 가을이었다. 늦은 오후, 파주의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연천에서 일몰을 보려면 시간이 빠듯해 열심히 달렸다. 해가 많이 내려갔는지 어둑어둑해질 무렵 호로고루성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니 멀리 커다란 성벽이 검은 실루엣으로 우뚝 서 있었다.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는 성벽의 실루엣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성에 다다랐다.
주차장 옆에는 호로고루 홍보관이 있고, 주차장과 성벽 사이 들판에는 줄기만 남은 해바라기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여름이면 노란 해바라기 꽃이 만발한 풍경으로도 유명하다.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호로고루성은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남한에 있는 몇 안 되는 고구려 유적 중 하나다. 강변에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진 성은 동쪽에만 성벽이 쌓여 있고, 다른 쪽은 강변의 절벽이 성벽을 대신하고 있는 형태라고 한다. 호로고루라는 이름은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과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진 말이라는 설이 있다.
하늘과 성벽, 그리고 강 위로 떨어지는 태양.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대 이상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날따라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새털구름이 층층이 덮여 있었다. 성벽을 올려다보면 점점 붉어지는 하늘에 구름이 모양을 바꿔가며 천천히 움직이고, 강을 내려다보면 붉은 해가 주변을 물들이며 천천히 강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성곽은 비스듬하게 놓인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는데, 사선 모양의 계단이 예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10미터 높이의 성곽 위에 오르자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과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성 위에는 관광객들이 많아 오래 머물기는 어려웠다.
성곽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지만, 성 둘레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감상하는 노을이 더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곽 위에서만 사진을 찍고 돌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성 둘레에서는 더 호젓하게 노을을 즐길 수 있었다. 들판 사이로 흐르는 붉은 물길, 층층이 다른 빛깔로 물든 하늘, 하늘의 색감을 더욱 살려주는 성곽의 검은 실루엣. 카메라를 어디에 들이대든 작품이 나왔다.
해가 질 땐 사람도 자연도 모두 실루엣이 된다. 호로고루성의 일몰 풍경은 특히 실루엣이 아름답다. 우뚝한 성곽의 실루엣, 성곽 위를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 성곽 아래 나무와 벤치의 실루엣. 하늘이 붉어질수록 태양과 맞선 것들은 검게 변하며 어둠 속에 묻힌다. 태양을 향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를 붙잡고 시간을 멈추려 해도, 결국 자연의 순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일까.
세상이 어둠 속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되면 문득 마음이 편안해진다. 더 이상 무언가를 열심히 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무언가를 하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나를 내려놓아도 되도록 허락된 시간. 어쩌자고 그런 시간이 주어져야만 하루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인지….
그렇게 조용히 어둠에 묻히는 시간, 잠시라도 실루엣 속으로 숨을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자연이, 세상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