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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22. 2023

강 따라 이어지는 노을의 시간

만경강에서 망해사까지

서해로 흐르는 강은 노을을 보기 좋아 낙조 명소가 많다. 해질 무렵이면 한강 변에서는 어디서나 그럴듯한 일몰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서해로 흐르는 강 중에는 만경강도 있는데, 만경강이라고 하면 이름은 들어봤어도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꽤나 있을 것이다. 


나도 취재나 여행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많이 다녔지만 만경강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여기저기 다니면서 스치기는 했겠지만, 만경강을 목적지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저 학창시절 사회 시간에 열심히 외웠던 만경평야 옆 어디쯤 있는 강이려니 했고, 사실 여행지로 떠올리거나 검색해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만경강이 내 여행 지도 안으로 성큼 들어온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탑과 전각이 있는 절 바로 앞으로 강이 흐르고, 그 위로 환상적인 노을이 내려앉은 모습. 절과 노을, 강을 함께 볼 수 있는 이런 곳이 있었다니! 찾아보니 그 절은 만경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망해사였다. 그 사진을 본 후로 절에서 노을을 보며 고즈넉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기 좋은 곳으로 망해사와 만경강을 점 찍어뒀다.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 사진이나 글이다. 마음을 흔드는 사진 한 장이나 글 한 줄에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 점점 커진다. 누군가의 가슴에 '확' 꽂힐 그 한 장의 사진과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사진가나 작가, 기자들은 그렇게 애를 쓰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찾아보니 만경강엔 유명한 것이 또 있었다. 늦가을이면 강을 따라 핀 억새가 절정을 이룬다는 것이다. 노을과 억새. 이 얼마나 낭만적인 조합인가. 노을은 어느 때든 볼 수 있으니, 억새의 절정에 맞추기 위해 어느 늦가을, 만경강을 찾았다.




   

만경(萬頃)은 ‘만 개의 이랑’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 넓은 들판을 품은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젖줄’이라 불린다. 전라북도 북서부를 가로지르는 80km의 물길은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해 완주·익산·김제·군산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만경강은 강변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도 좋다. 자전거길과 둘레길이 잘 조성돼 있어서다. 완주의 신천습지에서부터 강변을 따라 걸었다. 만경강은 20여 개의 습지를 품고 있다. 강폭이 넓고 보가 많아 습지가 형성되기 좋은 환경을 지닌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삼례읍 하리 근처의 신천습지는 광활한 규모에 독특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습지 사이로 들어서니, 갈대와 물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옆구리를 툭툭 친다. 보송보송한 은빛 붓으로 간질이는 느낌이 좋다. 갈대와 억새는 신천습지뿐 아니라 만경강 전역에 우거져 예로부터 ‘노전백리(蘆田百里)’라는 말이 전한다. 길을 걷다 무슨 기척이 나는가 싶어 돌아보니 갈대밭 사이에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다. ‘만경강의 허파’라 불리는 신천습지는 생태계의 보고다. 멸종위기야생생물인 황새·노랑부리저어새·금개구리를 비롯해 수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2.4㎞ 정도 이어지는 신천습지를 한눈에 보기 위해 회포대교에 올랐다. 다리에서 내려다보니 넓은 강 양쪽으로 두툼한 갈색 담요를 두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강 가운데에도 찢어진 담요 조각 같은 섬들이 떠 있다. 강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자갈과 모래 같은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하중도(河中島)'다. 신천습지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하중도는 수질정화와 생물다양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경강은 시간 여행을 하기 좋은 곳이다. 강변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천습지에서 삼례읍 쪽으로 가면 강 위에 가로놓인 오래된 다리가 보인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만경강 철교로 일제강점기인 1928년,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세워졌다. 476m 길이의 이 철교는 건립 당시에만 해도 한강철교 다음으로 긴 교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만경강교가 새로 놓이면서 그 역할을 다했고, 폐철교 위에는 새마을호 폐객차 4량을 리모델링한 ‘비비정예술열차’가 세워졌다. 레스토랑·카페·아트숍 등으로 꾸며진 비비정예술열차는 강을 바라보며 기차의 낭만을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열차 끝에 있는 카페의 테라스에 서면 강물 위로 길게 이어진 낡은 철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짝이는 강물과 억새, 낡은 철교와 열차. 가을의 서정과 낭만을 느끼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비비정예술열차에서 바라보는 노을도 근사할 것 같았으나, 노을 포인트가 정해져 있어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간 여행은 만경강 하류에서도 계속된다. 100년의 시간을 건너온 다리들이 강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익산시 목천동과 김제시 백구면을 잇는 구 만경교는 1928년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세운 다리다. 만경강의 큰 포구였던 목천포를 잇는다고 해서 ‘목천포다리’라고도 불린다.  

        

이 다리는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의 배경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해병대의 작전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 새로 개통된 만경교에 그 역할을 넘겨준 뒤 2015년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됐다. 현재는 강변에 다리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옛 사진이 담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끊어진 다리 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경교를 기억합니다.’



구 만경교 옆에 있는 만경강문화관에서 만경강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본 뒤, 또 다른 오래된 다리를 찾아 나섰다. 만경강 하류에 있는 구 만경대교로, 김제시 청하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잇는 530m 길이의 다리다. 1933년 김제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건설됐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다리로 알려져 있다. 신창진(新滄津)이라는 포구의 지명을 따 ‘새창이다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1989년 다리의 노후화로 인해 바로 옆에 만경대교가 놓이면서 지금은 차량 통행이 금지된 상태다. 

   

차도 없고 인적도 드문 다리에 올랐다. 난간엔 검푸른 이끼가 끼어 있고, 바닥엔 누런 잡풀이 돋아 있다. 세월의 풍파를 헤쳐온 다리는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 듯하지만 군데군데 허물어져 위태로워 보인다. 교각 주변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무성해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난다. 다리를 걷다 보니 어느새 아래로 내려온 태양이 다리 난간에 걸려 있다. 황량한 다리가 잠시 노란빛으로 따스하게 물드는 시간이다. 


 

다리도 내가 여행에서 의미를 두고 바라보는 대상 중 하나다. 이상하게도 다리는 단순한 구조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길과 길을 잇는 다리를 보면 늘 시간과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저 다리를 건너면 무엇이 나올까. 저 다리 너머에 어떤 새로운 세상이 있을까. 저 다리에 서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크고 작은 수많은 다리를 건너며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새창이다리의 낡고 쓸쓸한 모습에 너무 푹 빠졌던 걸까. 어느새 해가 다리 가까이로 훌쩍 내려와 있다. 다리에서 보는 일몰도 나쁘지 않겠지만, 망해사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망해사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자동차의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달리고 달렸다. 그런데 가는 길은 빨리 달리기엔 너무 아까운 길이었다.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강물, 억새의 하얀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곳에 멈춰 서서 노을을 봐도, 아니 노을을 보지 않더라도 좋을 그런 풍경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대가인지, 망해사에 도착하자 해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막 넘어가면서 남긴 검붉은 기운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탄성이 나왔다. 절의 담장 너머로 펼쳐진 넓은 바다와 검붉은 하늘. 이름처럼 정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절이라니! 



671년 김제시 진봉면 진봉산 기슭에 부설거사가 처음 지었다는 절에는 낙서전과 칠성각, 400년 된 팽나무가 있다. 망해사의 낙조는 종각과 탑, 팽나무의 실루엣으로 완성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수록 실루엣은 점점 검게 변하며 바다와 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비록 해는 사라졌지만, 멀리 고군산군도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을 담기 위해 절 위쪽의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강과 바다가 함께 그린 독특한 추상화가 펼쳐져 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맞으며 검은 실루엣이 검은 하늘과 바다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망해사에서 한 장의 사진과 똑같은 풍경은 만나지 못했지만, 만경강에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을 온전히 만났다. '노을의 시간'은 해가 떨어지는 한 순간이 아니다.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점점 내려오며 세상과 만나는 시간,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해가 존재를 드러내며 노랗게 붉게 파랗게 검게 변해가는 그 모든 시간이다. 그 따스하고 찬란하고 쓸쓸하고 고즈넉한 시간. 그런 노을의 시간을 사랑한다. 만경강은 그 모든 시간을 선물해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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