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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22. 2023

기다림으로 달라지는 삶의 빛깔

충주 물길

굽이굽이 물길이 이어지는 곳, 그러다 해가 질 때면 그 물길 위로 그림같은 노을이 떨어지는 곳. 충주는 그런 곳이다. 우리나라 가운데쯤 자리 잡은그저 그런 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충주는 ‘내륙의 바다’라 불린다. 남한강 물길을 막고 충주댐을 만들면서 생긴 충주호 덕분이다. 호수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36번 국도를 따라 호수를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해도 좋고 유람선을 타도 좋다.      


또 다른 방법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충주호 주변으로는 월악산 자락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도 악어봉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36번 국도 변에서 시작되는 산길을 따라 40∼50분 올라가면 해발 448m 높이의 악어봉 정상에 다다른다. 900m에 이르는 길은 비법정 등산로지만 악어봉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다녀 자연스럽게 다져졌다. 올 11월에는 정식 등산로가 열린다고 한다. 



짧은 산행이지만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자, 잘생긴 소나무 옆으로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법정 등산로인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르는지 이해가 됐다. 정말 이름처럼 파란 호수에 악어 떼가 득시글한 풍경이라니. 초록색 악어들이 사방에서 호수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는 모습이랄까. 




산행을 마친 뒤,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길에 어리는 노을을 만나러 갔다. 충주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곳은 충주호 북쪽, 호수가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이다. 건지마을은 최근 일몰 풍경이 알려지면서 해 질 무렵이면 사진작가들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조동근린공원을 지나 건지마을회관 쪽으로 경사가 급한 비탈을 따라 오르면 얼마 가지 않아 일몰 포인트가 나온다.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엔 ‘충주 일몰 명소’라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난간에서 바라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충주 시가지와 그 가운데로 흐르는 ‘S’ 자 모양의 남한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산 능선과 해 사이의 거리가 한 뼘쯤이나 될까. 



전망대가 있지만, 늘 그렇듯 전망대 주변을 오가며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둘러봤다. 전망대 위쪽의 언덕 꼭대기에까지 올라갔지만 나무에 가려 전망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망대가 최상의 포인트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전망대로 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 작은 마을 꼭대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누가 먼저 알았을까. 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의 노을은 늘 보는 일상이겠지. 전망대에서 일몰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 얼마만인가. 이렇듯 날씨와 시간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최상의 조건을 갗춘 게. 하늘만 바라보며 온전히 노을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서정윤 시인의 시 '홀로서기'의 한 구절처럼 일몰을 기다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가. 잠깐의 기다림조차 허용하기 힘들 만큼. 무언가 기다리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바라보고 충전하며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인데 말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뒀던 것들도 찬찬히 꺼내보고 들춰볼 수 있는 시간. 


기다림을 지루해하거나 기다리는 시간을 무용한 시간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도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누군가를 만날 때도, 무슨 일을 할 때도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만 더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일상이 얼마나 더 여유로워질까. 그러려면 삶을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겠지. 사실 일상의 '조금'이 중요하고 그것들이 모여 무언가가 이뤄지는 건데, 우린 너무 큰 것만 바라고 사는 건 아닌지. 



전망대 안내판에는 3월 중순과 9월 중순에 물길 가운데로 해가 떨어진다고 적혀 있다. 해가 떨어지는 위치가 계절마다 바뀌니 ‘S’자 물길을 배경으로 한 노을 풍경은 날마다 조금씩 다르다. 하늘을 보니 해가 ‘S’자 오른편으로 조금 치우쳐 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해는 점점 붉게 변하면서 조금씩 내려오고, 하늘과 산과 강은 그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뒤척이고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절정의 시간. 여유를 갖고 기다린 덕분인지, 조금씩 달라지는 순간순간을 모두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과 강물의 빛깔. 해는 빛을 물에 풀어내고, 빛을 품은 물은 벌겋게 끓어오르다가 깊고 검은 우물처럼 차갑게 식어간다. 우리 삶도 날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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