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상대의 마른 손에서 토끼 키링을 날카롭게 낚아채며 돌아서 버린다. 버릴 때는 언제고 내 이름은 왜 불러. 저 책임감없는 입가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 조차 싫었다. 5년만에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엄마라니. 마음이 복잡했다. 오늘 하루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는데 다시 빠르게, 선재의 가슴속이 검은 액체로 메워지고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난 부모없는 사람이야. 이제와서 뭐 어쩌라고. 아무일도 아니야.'
가슴이 시려왔다. 아무리 미워도, 받은게 없어도 그래도 엄마라고, 모른척하려니 힘들었다. 그러나 이유도 모른 채 버려진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나 세상 착한 어미의 얼굴로 자식을 바라보는 저 얼굴이 가증스럽기도 했다. 말없이 세차게 뒤돌아 주연이 이모를 부르려는데 이모는 부들부들 떨며 선재엄마를 째려보고 있었다.
"뭐여? 주남이 성이여? 주남이 성 맞냐고?"
"......"
"이게 지금 꿈이여 뭐여? 워딨다가 매급시 나타난거여? 엉?"
"......아까 낮에 보고 계속 따라다녔어. 선재 내 딸이야. 어떻게 둘이 있어?"
"뭐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선재는 어리둥절했다. 주연이 이모는 선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놀랍기는 셋 다 마찬가지였다. 선재는 갑자기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연이 이모가 갑자기 멀게 느껴지면서 혼자 있고 싶었다.
"......우, 우리 워디 잠깐 가서 얘기를 좀 해야 쓰겄다."
김주남. 선재엄마의 본명이었다. 주남은 아픈 엄마의 병원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했다. 아버지의 벌이로는 병원비는 커녕 생활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동네 밭에서 채소를 따고, 저녁에는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주남은 쪽잠을 자가며 지독히 돈을 벌었다.
같은 공장에 다니던 이현성은 홀로 타지에서 이 동네까지 흘러들었다. 부모없이 혼자 생계를 유지하다 일하던 곳이 화재로 불타,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어쩌다 보니 이 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착하고 성실한 주남과 가까워졌고, 매일 새벽 집까지 오토바이로 주남을 태워다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주남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주남은 하루종일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것 같았다. 그리고 퇴근하는 길에 엄마 병원비 때문에 잠깐 은행에 들러야 한다고 했다. 날이 추워 ATM기가 있는 곳에 같이 들어가 있던 이현성은 그 때 주남의 통장잔액을 슬쩍 보았다.
"우리 애기도 생겼는데 집 구해야지."
"아직 그럴 때가 아니야."
"그럼 어쩌자고? 애를 어디서 키우려고? 나는 고아라 공장에서 먹고 자는데."
"알지...... 근데 지금은,"
"지금은 뭐! 니 인생은 없어? 시발. 언제까지 부모 뒤치닥거리 하고 살거야? 너 등신이야? 어차피 니가 이 집에 있어도 별로 도움도 안돼. 그냥 나랑 도망가서 살자."
"안돼."
"안되긴 뭐가 안돼! 니가 나 없이 애 혼자 키우고 니 엄마 병원비 대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니가 뭐라도 돼? 나랑 있어야 니가 뭘하든 할 수 있어. 너처럼 못 배우고 무식한 애를 누가 알아나 줄까?"
"......그래도......"
"아, 진짜 답답하네. 나나 되니까 너하고 함께하려고 하는 거야. 넌 못 배우고 가진게 없으니까 나랑 가면 돼. 오늘 빌린 돈 있지? 그거랑 집에 있는거 돈될만한거 뭐 집 계약서나 땅 문서 같은거 있으면 우선 가지고 와봐."
"그건 왜?"
"니가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내가 관리해서 더 불려줄테니까, 가져오라고. 나 못 믿어?"
"아니, 믿어."
"그럼 아예 니꺼 짐도 대충 싸서 나와. 우리 딴데 가서 살자. 니네 집 형편 지겹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니 인생 사는거야. 니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애기도 키우고. 이름도 바꿔. 미자 어때?"
"촌스러운데."
"나 버린 엄마 이름이래. 이제 니가 미자 해. 나랑 같이 가자."
주남은 여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 자신만의 인생,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촌스럽지만 새로운 이름까지 생기자, 주남은 이현성이 마치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준 신처럼 느껴졌다. 주남은 새로운 인생을 살 생각에 현성이 시키는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이현성은 작게 소리를 쳤다.
"야, 씨. 빨리 안 나와?"
"......알았어. 다 가져왔어......"
"다 챙겼지?"
"무서워...... 그리고 이거 엄마 병원비야...... 나 가기 싫어."
"너 진짜 나쁜 엄마 아니냐? 니 때문에 니 뱃속에 애기, 집도 없이 그냥 죽일거야?"
"미안......"
이현성과 주남은 오토바이를 타고 급하게 골목을 달렸다. 그때, 건너편에타지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주남의 아빠가 엄마 병원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의 모습을 본 주남은 급히 얘기했다.
"안되겠어. 나 안 갈래."
"이게 뭐라는거야. 이씨."
이현성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더 내어 달렸다.
"천천히 가! 이러다 아빠 치겠어! 어! 어!!"
쾅.
"멈춰! 아빠!"
본인이 탄 오토바이에 의해 나가떨어진 아빠를 목격한 주남은 놀라 사색이 되었다. 이현성은 주남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멈추라고!! 제발 멈춰! 제발......흐흑......멈추라고!!! 아빠!!! 멈춰!! 이 새끼야!!!"
주연이 이모의 큰 목소리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연이 이모는 미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울었다. 깡마른 미자는 몇가닥 없는 머리채를 잡힌 채 아무런 저항없이 나풀거렸다. 엄마의 도망은 오래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음에 질려버린 선재는 오히려 덤덤하게 미자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