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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Nov 06. 2023

4 기원이 아빠 1

        

 “기원이 아빠! 돌담집 옆집에 사과 한 박스, 유정이네 오이 두 박스, 삼거리 앞에 파란 대문집에 대파 10단이랑 배추 20포기, 여그 내가 적어놨응께 언넘 갔다와잉.”

 “예.”


 정례는 새벽부터 경매로 받아온 채소와 과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좋은 물건을 가져오려면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채비를 해야한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 이 채소가게는 남편도 없이 혼자서 아들 하나 키우면서 악착같이 일궈낸 소중한 일터였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를 업은 채 사과 몇개, 귤 몇개 길거리 좌판장사부터 시작하여 가게에 세를 얻어 들어오기까지 가게를 키워낸 정례는 이 동네에서는 혼자 애키우는 독한 아줌마로 이미 유명했었다. 혼자산다고 나쁜 짓을 하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드세고 사납게 굴어야 했다. 틈을 주지 않는 억척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사장님, 다, 다녀왔어요.”

 “이, 그려. 일로 와서 인자 쪽파 좀 다듬어 놔. 다듬어서 500g씩 10개만 포장 좀 허고. 여러번 해본 것잉께 할 수 있겄지?”

 “예.”     

 “기원이 아빠, 안녕하세요? 나 귤 한 바가지 줘요.”

 “예.”

 “기원이는 잘 있어요?”

 “예.”

 “언제 기원이 우리집에 놀러 오라고 하세요.”

 “예.”

 “여기, 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예, 고, 고맙습니다.          




 정례의 채소가게에서 일하는 기원이 아빠는 채소가게가 처음 문을 열던 날 새벽, 아직 장사시작도 안 한 가게에 찾아왔었다. 정례는 여느 때와 같이 받아 온 채소와 과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 갑자기 가게 문앞에서 서서 얼쩡거리는 기세에 정례는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여차하면 경찰서에 전화해야지, 하며 전화기에 손을 가져다 놓고 정례는 가만히 남자를 관찰했다. 2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뽀얗고 앳된 얼굴, 보통의 키에 어정쩡한 표정으로, 한 손에는 졸린 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고, 한 손에는 아이가 먹다 남긴 것 같은 빨대꽂힌 우유와 빵을 들고 있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 사람을 구하신다고 해서요.”

 “누, 누구세요?”

 “저, 저 사람을 구, 구하신다고 해서요. 사장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 사람, 은 구하긴 하는데.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낯선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젊은 정례는 한손에 몽둥이같은 긴 구두주걱을 들고 거세게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흠칫 놀란 남자는 속눈썹이 긴 초식동물처럼 순해 보였다. 정례는 약해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내리깔며, 맹수처럼, 허리춤에 양손을 대고 턱을 들어 도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와중에 어린 영석이 깰까 두려워 목소리는 작게 내는 모습이 참 어울리지 않음을 스스로 우습다고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저, 저 일을 해야해서요. 아, 아들을 저, 저 혼자 키우는데 일을 해, 해야해요. 저, 히, 힘도 쎄요.”

 “조카가 아니고 아들이라고요? 아들이 몇 살이에요?”

 “다, 다섯 살이요.”


 의외의 상황에 정례는 허리춤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어린 두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정례는, 졸린 눈을 비비고 겨우 서서 어딘가 모자란 듯한, 형같은 아비의 손을 꼭 잡고 약간 뒤에 숨어 서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모자란 아비는 아이의 전부일 것이다. 따뜻한 방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같은 나이의 자신의 아들 영석에게 정례가 전부인 것처럼.     


 “애기 이름이 뭐에요?”

 “기, 기, 기원입니다.”

 “애 아침은 먹였어요?”

 “네, 네. 빠, 빵 조금 먹었습니다.”

 “애 밥이라도 먹이고 나오시지...... 나 월급 많이는 못 줘요.”

 “괘, 괜찮습니다. 일만 하게 해, 해주시며는.”

 “애랑 둘이 살기에 많이 부족할텐데.”

 “괘, 괘, 괜찮습니다. 괜차, 찮습니다.”

 “학생은, 아니 총각은, 아니 아들이랬지,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저, 저는 그냥 기, 기원이 아빠에요. 기, 기원이 아빠요.”

 “말을 많이 더듬어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기, 긴장하면 더, 더, 마, 말도 더듬고 겨, 경계선 지능 자, 장애가 있어요.”

 “경계선 뭐요?”

 “그, 그, 다, 다른 사람들 보다 기, 기억도 잘 못하고요, 지, 지능이 조금 떠, 떨어져요. 그, 그래서 여러번 외우고 할께요. 까, 까먹으면 또 외우고 또, 또 외우고 하, 할께요. 마, 말도 안 할께요. 그리고 저 힘도 세요. 과, 과일, 배추 무, 무거운 거, 다 잘 드, 들 수 있어요. 아들 키, 키워야 해서...... 부탁 드리게, 겠습니다.”


 정례는 당황스러웠지만, 같은 나이의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는 입장에서 총각같은 젊은 아빠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모자란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해.     


 “미안해요. 안되겠어요.”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저 바보라서 저, 아무데서도 일 모, 못하게 해요.”

 “미안해요. 가요.”

 “제, 제발, 부, 부탁......”     

 정례는 모질게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아빠, 왜 그래? 아줌마 화났데?”

 “기, 기원아, 미안해. 조, 조금만 기다려봐. 아빠가 하, 한번만 더 말해볼게.”

 “아빠, 나 졸려.”

 “그, 그래. 미안해.”     


 기원이 아빠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어쩔 줄 몰라했다. 25살, 어린 아빠는 작은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당황하여 안절부절했다. 그나마 작고 가는 아이의 손을 꼭 잡는 일이 25살의 어린 아빠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어린 아빠는 다시 한번 가게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저, 저기 사장님. 아, 아침 일찍 와서 죄송합니다. 저, 내일 다, 다시 올께요.”

 “아빠, 배고파.”

 “빠, 빵 먹자.”

 “싫어. 이거 맛없어. 밥 줘.”

 “아, 알았어. 집에 가자. 미안해.”     


 기원이 아빠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성실하게 정례네 가게에 찾아왔다. 정례네 가게에는 4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고용되어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 다음날에도, 뽀얀 얼굴의 기원이 아빠는 월급도 없는 일터에서 아저씨를 도와 일을 거들며 가게를 서성이고 있었다. 직원 아저씨는 어리숙해 보이는 기원이 아빠를 무시했다. 동네 바보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말없이 배시시 웃으며 하라면 하란대로 일을 하는 기원이 아빠를 오히려 이용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저씨보다 기원이 아빠가 가게에 더 오래, 많이 일을 할 때도 있었다. 정례는 이런 기원이 아빠가 불편하고 안쓰러웠지만 모른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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