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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Apr 08. 2021

마지막에 잃을 것은

당신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이고 싶은가요?

할머니는 1920년,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청춘은 일제강점기에 북으로 만주로, 그리고 다시 남으로 떠돌아야 했다. 청년과 중년 시절에는 자식들을 낳아 씻겨 기르느라 손마디가 모두 불거지고, 지문이 닳았다. 노년의 시작과 함께 반려자를 잃었다. 평온하지만 때때로 자식 걱정에 마음 편치 못한 날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그녀의 인생을 지나갔고, 그녀는 어느덧 정정하다는 말을 듣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가 90이 된 어느덧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치매가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동안 느리게 쌓아온 세월들은 빠르게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잊기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정들과 물건을 놓은 자리, 날짜 같은 것들이었다. 그녀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이 변화에 대해 그저 노화로 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다음으로 사건들을 잊기 시작했다. 만주벌판에서의 고생길과, 자식들이 말썽부린 일, 부군과의 추억들을 이야기하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 말수가 줄고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그녀는 사람들을 잊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주변사람들도 그녀의 병을 알았고, 치료가 시작되었다. 증세는 잠시동안 호전되거나 늦춰졌겠지만, 진행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이웃들을 잊고, 먼 친척들을 잊고, 그리고 마침내 간간히 가족들까지 잊기 시작했다.


사람의 인생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이라면, 기억을 잃어가는 그녀는 인생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된 과거가 같이 지워진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처럼 보였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기억한 것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막내 아들. 나이 36세에 가까스로 얻은 귀한 아들을 그녀는 마지막까지 기억했다. 말이 나오지 않아도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때때로 눈물이 글썽이는 것으로 우리는 할머니가 아들만은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인생에 마지막에, 가장 사랑했던 이일 것이리라.


우리 모두가 그녀와 같은 비극을 겪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떠나보내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감내할 인생의 부분일테니. 무언가를 떠나보낼 때, 우리 안의 어떤 부분도 함께 죽고 소멸되리라. 소중한 것은 이미 내 일부이므로. 그러니 잃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하며, 상실은 몇 번이건 아프고 아픈 일이리라.  


그러나, 끝내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사랑하고 아끼던 것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는다 하여도, 무엇을 마지막에 남길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린 것이리라.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잃을 것은,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남길 것은,

가장 귀하게 사랑하고 간직한 것일 테니.


그것은 모든 이별과 아픔 이후에도, 우리 자신의 소멸 이후에도 충분한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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