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이곳에 없었다
참 불친절하다. 관객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은 영화인 것 같다. 불친절한 영화라고 해서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결국에는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하게 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이 불친절함을 통해 이 영화는 무엇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보고 왔다.
이 글은 영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조’는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폭력이 좋아서 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폭력은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폭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폭력을 좋아하지 않은 그가 왜 폭력을 사용할까? 우선, 자신이 의뢰받은 일을 해결하지 위함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야기할 때 과민 반응을 보인다. 그에게 콤플렉스는 과거에 자신이 받은 폭력일 것이다. 그 환상이 아직까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그가 넉넉한 형편도 아니고, 노모와 함께 사는 입장에서 자신의 것을 더 잃지 않으려면 더 단단히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콤플렉스 때문에 ‘니나’에 대한 애착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의뢰를 받긴 했지만, 자신이 의뢰를 받은 것을 넘어서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영화 [미쓰 백]에서의 미스 백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일을 누군가가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 상처는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기 위해, 폭력을 행하게 되고 그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력과 멀어질 수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영화도 폭력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행위가 있었던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가 폭력을 행하면서 어떤 감정으로 했고, 어떤 행동으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폭력을 행하고 나서의 그의 표정과 그가 이 폭력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진짜 폭력을 좋아했다면, 놀이터에서 나온 그 남자를 그냥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살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인지 모르게, 영화 속에서 ‘조’는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에도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을 하기에는 책임질 것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임질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어머니 일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중반부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다는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에게는 죽음보다 고통이 더 괴로운 모양이다.
그 고통은 기억이라기 보다는 충격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도 그의 과거 기억이 회상이 아니라 고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고통은 시간의 순서에 맞게 배열되어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어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 비슷한 상황에서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은 고통이 된다. 사람의 뇌는 참 불친절하다. 예고하지 않고, 어느 순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찾아내서 보여준다. 이 영화의 불친절함은 ‘조’의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영화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일까. 과거형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라는 대명사를 썼기 때문에, 지금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고, ‘너’라는 인칭대명사를 썼기 때문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다. 해석해보면, ‘과거에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 당신은 이곳에 없었다.’로 풀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과거는 ‘조’의 기억만이 나온다. 과거는 ‘조’의 기억일 것이다. 어떤 일이라는 것은 ‘조’가 당했던 폭력과 군인으로써 겪었던 죄책감들일 것이다. 이런 것들로 추론해보면, 어떤 곳이라는 것은 ‘조’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신은 ‘조’와 함께 있지 않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겪은 ‘조’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니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냥 지나친다면 그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는 자신이 원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을 사용하면서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아동 성매매라는 악행에서 ‘니나’를 구하기 위해 폭력이라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영화도 그것에 대해 인지하고,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자제한 것이 보였다. 덕분에, 청불 영화 같은 이 영화는 15세 등급 판정을 받았다. 결국, 어린 ‘조’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른이 된 ‘조’같은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이 질 책임에 대해 없어져 자신도 어머니와 함께 죽음을 선택했던 ‘조’는 ‘니나’라는 책임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 일에 대한 죄책감과 기억에 대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죽음을 영화는 천국과 같은 느낌으로 표현했다. 밝은 빛을 통해서, 그가 죽음의 순간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그곳은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조’가 어머니와 함께 빠지려고 했던 곳도 그가 들어가면서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된 밝은 빛으로 그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은 평온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곳을 다시 나온 이유는 ‘조’는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는 천국 같은 죽음을 미루고 다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니나’와 함께 하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조’가 총으로 자살을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그런 죽음을 사회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동 성매매를 잡기 위해 경찰이나 공권력이 아니라 개인의 폭력을 사용했다. 영화에서는 그 폭력이 정당하다고 하지 않다고 보여주고 있고 결국, 사회의 무관심이 이들을 죽게 했다는 해석을 해볼 수 있게 한다. 또 한 가지는 그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조’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들 ‘조’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에 급급하여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조’가 잠든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니나’가 그를 깨우고, ‘조’가 얼마 남지 않은 딸기 셰이크를 빨아먹는다. 밝은 햇살이 창을 넘어 그들에게 비친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천국에 있던 것을 아니었을까?
나약한 그가 더 나약한 그녀를 위한 행동을 보여주는 영화다.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미쓰 백]과 비슷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관심 가지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조’와 ‘니나’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 결국, 당신도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4 / 5 당신도 그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