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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Aug 23. 2020

다시, 내 이름은 김딸공

[일일딸공] 못다한 엄마의 이야기, 엄마에게 못다한 이야기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 요시모토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中에서.     




 2001년 여름, 연합동아리 봉사활동으로 연변자치구에 조선족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부모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고 아이들만 기숙사에 남겨진 학교였는데, 방학이면 학교가 문을 닫아 오갈 곳이 없다고. 대구 토박이였던 나조차 쉽게 잠들지 못했던 집안시의 뜨거운 여름, 6인실 기숙사에서 아이들과 한 달의 시간을 보내며, 어쩌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도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교사가 되어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연변 사투리로 ‘딸질한다’는 말이 있다. 헤어질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날, 한 아이 입에서 나온 말. 일 년에 한두 번 엄마가 올 때는 진짜 잘하려고 했는데, 반가우면서도 자꾸 짜증을 부리고 만다고. 왜 그렇게 딸질을 했을까, 떠나면 내내 후회만 한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물어볼 필요 없었다. 아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바로 이해해 버렸으니까. 나도, 수없이, 하고 또 했던 일이니까.      


 딸공! 하고 부르는 게 싫었다. 어릴 때부터 듣던 그 말이, 갑자기 어느 순간 너무 싫어졌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데? 묻기라도 하면, 내 입으로 공주라고 말하라고? 속 모르는 친구들은 딸공이 뭐야, 딸기공주야? 하고 물었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하지 말라고 그게 더 싫다고! 어디서부터 엉킨 건지 알 수도 없는, 깊은 골이 생겼다 마르기를 수십 번 수백 번. 가장 사소한 것에 눈물이 차오르고, 가장 사소한 것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기나긴 준비 기간과 엄청난 통과의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막연한 상상과 달리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스무 살, 그냥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루 이틀 쯤 수업을 빠져도 돌아오는 건 잔소리가 아니라 숫자로 명시된 학점일 뿐이었다. 무엇을 입고 먹을 지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까지 모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자유의 대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결과를 내었고 항상 칭찬을 받아왔는데 왜 완벽한 어른이 되지 않는 걸까? 주어진 과제를 분명 빠짐없이 했는데,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 같은 불안. 나, 뭘 놓치고 여기까지 온 거니?      


 딛고 선 땅마저 매일 푹푹 발이 빠지는 듯한 날들이 계속되던 순간, 깨달았다. 이 세상에 더는 나를 공주라 불러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는 ‘딸공’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공주처럼 소중한 사람으로 자라왔다는 믿음. 생각만으로도 마음 든든해지는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걸 왜 그땐 몰랐을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이후, 더는 나를 딸공이라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딸공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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