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딸공] 못다한 엄마의 이야기, 엄마에게 못다한 이야기
제주도를 한 번 가야겠어. 남들 다 가보는 곳을 나만 못 가봤더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아빠는 회사를 떠났다. 알루미늄회사에서 통근버스를 운행한 지 만 20년, 회사 소속 노동자는 아니었지만, 명절이며 창립기념일마다 프라이팬이나 냄비를 받아오곤 했으니 우리는 아빠가 그 회사 직원이라고 생각했었다. 통근버스 기사들끼리 결성한 아빠의 계모임도 굳이 회사 로고를 넣어 회칙을 만들었던 걸 보면, 아빠의 소속감 또한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회사는 버스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으며 돈이 많이 드는 지입차량과 직고용 기사를 모두 정리했고, 그것은 당연한 시절의 선택이었다.
아빠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먼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렇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시간을 칼같이 지켜 출근했다. 엄마의 기준에서 그것은 가장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미덕이었으므로, 엄마는 아빠가 곧 다시 일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러니, 잠시 쉬는 동안 여행을 가보자고 했다. 평생 비행기 한 번 못 타본 사람은 당신뿐이라며.
야후와 라이코스를 뒤적여 비행기와 펜션을 예약했다. 호텔은 엄청나게 비쌀 것 같고, 콘도라는 곳은 원래 부자들이 가는 곳이니까 예약이 어려울 거야, 홈페이지마다 올라온 예쁜 사진을 고르고 골라, 펜션을 잡았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바로 전 학기에 중국으로 봉사를 다녀온 나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제주도가 그렇게 큰 줄은, 정말로 몰랐다.
제주공항에 내려 셔틀을 타고 이동했다. 셔틀버스 비용은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숙소가 있는 동네까지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저녁 도착이라 하루 치 렌터카 요금이 아까워 다음날 아침 펜션에서 인수하기로 예약했던 건데, 펜션으로 나온 렌터카 직원은 인수 비용을 달라고 했다. 인수 비용에 셔틀버스 요금을 더하니 하루 치 요금과 거의 맞먹었다. 이런, 여행을 해봤어야 알지!
겨울에 뭔 비가 이렇게 온대?
노후 자금으로 제주도에 내려와 펜션을 시작했다는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맞이하며 정말 오랜만에 비가 온다고 했다. 겨울에도 태풍이 오나 싶게 퍼붓던 비와 바람. 2박 3일의 짧은 일정인데 숙소를 두 군데 예약한 나. 기억을 더듬어보면 공항에서 한 시간 반이 걸린 첫 숙소는 중문쪽이었던 것 같고, 두 번째 숙소는 애월과 협재 사이 어느 산속이었던 것 같다. 어찌나 깊은 산 속 통나무집이었던지, 들어가는 길에 몇 번이나 주인과 통화하며 여기가 맞냐고 확인했던 기억. 요즘 <나혼자산다>의 곽도원씨네 집을 보면서, 우리가 그때 갔던 숙소가 저 위치쯤의 어디겠다, 생각한다. 세상에!
여행 내내 비가 왔다. 잠시 갰다가 또 왔다. 그래서 여행이 엉망이었나? 그건 아니었다. 아직도 대구 집 책상 유리 밑엔, 그 여행에서 웃고 있는 엄마와 내 사진이 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돌아다녔던 건지 모르겠지만, 민속촌, 만장굴, 곽지해수욕장에 테디베어 박물관, 소인국 테마파크까지 몽땅 사진이 있다. 이게 저녁 도착 2박 3일에 가능한 코스인가? 비 오는 제주에서 차를 타고 대체 얼마나 쏘다닌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2003년 겨울 우리의 제주는 그냥 웃기고 슬프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결항 되어 공항 근처 여관에서 1박을 추가한 기억까지. 완벽하게, 웃기고 슬픈 여행이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아빠의 실직이 그렇게 길 것을 알았더라면, 엄마의 남은 날이 그렇게 짧음을 알았더라면, 여행의 색깔이 달라졌을까. 아빠의 실직 앞에서 한 타임 쉬어가자고 뜬금없이 여행을 외친 엄마, 돌이켜보면 가장 엄마다운 선택이었다. 웃기고 슬픈 여행이지만, 그래도 그 때 여행하기 정말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