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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Aug 29. 2020

마지막 알람 시계가 세팅되었다.

[일일딸공] 엄마의 못다한 이야기, 엄마에게 못다한 이야기.

 엄마의 몸이 붓기 시작했다. 한번 눌린 피부가 다시 올라오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리고 손가락이 마디마디 곱아서 잘 굽혀지지 않았다. 만성신부전증. 신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진단 앞에서도 ‘만성’이라는 단어는 조금 희망적으로 들렸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야.      


서문시장 입구의 대형 약국에서는 알부민을 동네 약국보다 저렴하게 팔았다. 백 밀리짜리 작은 병 하나에 사만 원. 이십오 년 전 물가로도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알부민 수액을 한 대 맞으면 한두 주는 견딜만하다고 했다. 보험처리도 안 되는 품목이라 병원에 가면 더 비싸서, 엄마의 아는 언니가 매번 수액을 놔 주고 갔다.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저 이모는 간호사 출신이라고 엄마는 힘주어 말했다. 집에서 서문시장까지는 버스로 50분, 뜨거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한 달에 한 두 번, 서문시장을 다녀왔다. 그렇게 버틴 시간이 한 해, 두 해, 결국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여름, 엄마는 혈액투석을 시작했다.      


혈액투석이라니, 수능 선택과목 생물Ⅱ에서 킬러 문항으로 단골 출제되던 영역 아닌가. 그러니 나는 혈액투석의 메커니즘과 장단점, 생물학적 의의 등을 완벽히 외우고 있었다. 혈액투석 환자의 병증 및 경과에 대해서도. 투석기만 믿으면 된다, 인공신장의 역할을 해줄 테니. 복잡한 일도 아니다. 이게 뭐라고 그동안 알부민 따위를 맞으며 버텼던 거야!


그러나 생물Ⅱ 교과서나 하이탑, 기출문제 어디에서도 혈액투석을 위해서 팔에 삽관을 해야 한다는 것, 내내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날것을 먹지 못한다는 것, 수분 섭취량까지 밀리그램 단위로 재서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써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혈액투석 환자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이 길어야 10년이라는 것은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알았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자신은 없지만.  


인공 혈관을 삽입했다. 손목과 팔꿈치 두 군데씩, 양팔 총 네 군데. 한쪽 팔만 하면 안 되는 거야?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하려면 한팔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직경 1m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주삿바늘을 주 3회 꽂아야 하니, 사람의 혈관이 버텨낼 리 없다 했다. 엄마의 손목과 팔꿈치에는 불룩하게 솟아 나온 인공 혈관이 만져졌다. 손가락을 대고 있으면 엄청난 떨림과 쿵쿵대는 심박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우와 신기하다! 심장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세게 뛰는 거였어? 엄청난 생의 신호 앞에서 뭔가 희망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사실은 생의 마지막 알람 시계가 막 세팅되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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