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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Aug 27. 2020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괜찮지 않은 날들

[일일딸공] 못다한 엄마의 이야기

 한 동짜리 빌라로 이사를 했다. 동대구역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지대 높은 빌라,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건물에 우리 집은 3층이었다. 엄마는 3층이 로얄층이라고 했다. 엄마가 줄곧 입퇴원을 반복하던 파티마병원이 코앞이었다. 여차하면 병원에 바로 갈 수 있어! 아빠는 집 위치가 좋다 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마당 대신 베란다에는 화분이 쌓여갔다.      


야, 너 집에서 전화 좀 해달래!

0교시가 있던 고등학교 때, 새벽같이 학교에 와 자습을 한다고 앉아있는데 친구가 들어오며 말했다.      


- 누가? 
- 몰라, 니네 윗집 사는 애라던데? 집에 꼭 전화하라고 전해달라고 하고는 가버렸어.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학교에 가버리면 연락할 길이 없었다. 어차피 갈 곳은 학교뿐이니 딱히 연락할 일도 없었다. 야자 끝나면 오밤중이니 낮에 집에 전화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집에서, 갑자기 왜?      


- 무슨 일인지는 모른대?
- 모르겠는데?      


학교에 하나뿐이던 공중전화로 달려 내려가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내가 아침에 엄마랑 인사는 하고 나왔던가, 엄마가 아침에 아팠었나? 새벽에 깨우는 엄마한테 승질을 부렸던가, 안 부렸던가. 어젯밤에 내가 엄마한테 쓸데없는 소릴 했었나? 몇 분 전, 몇 시간 전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는 하래놓고 왜 안 받는 거야?      


공중전화 줄은 길고, 조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나는 똑똑하고 싸가지 없는 학생이었다. 아니, 나는 내가 예의 바른 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본 어른들은 죄다 싸가지가 없다고 말했다. 고분고분하지가 않고 자꾸 왜냐고 따져 묻는다는 게 이유였다. 보충수업을 꼭 해야 하냐, 야자는 왜 강제냐, 모의고사 성적은 왜 1등부터 10등까지 실명으로 써서 붙이는 거냐, 무슨 올림픽 메달도 아니고.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투성이였는데,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아니라 학교 아니면 세상이었던 거 같은데, 왜냐고 묻는 나를, 어른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학교에서 좀처럼 눈물을 흘리는 학생이 아니었다. 울면 봐주기라도 할 텐데 쟨 혼나도 울지도 않는다고, 더 혼나곤 했다. 그런데 내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요.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저 어떡해요?’     


조회 시간, 엉엉 울며 교실에 들어와서 소리치는 나를 바라보던 담임선생님의 황당한 표정. 뭐야, 얘도 울 줄 아는 애였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선생님께 뭐라고 했더라. 엄마가, 엄마가, 엄마가... 엉엉 울기만 했다.      


엄마는 무사했다. 담임이 나를 교무실로 데려가 집에 전화를 여러 번 건 뒤에야 엄마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고, 엄마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도 내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던 것만 기억한다. 아침에 현관 잠금장치가 고장 나서 비번이 초기화되어 버렸다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였더라? 뒷이야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괜찮지 않은 날들이었다. 당장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도, 매일 아침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딸질을 해댔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은,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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