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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쑤루쑥 Jun 24. 2021

꼰대주의보

당연히 꼰대가 싫었다. 10대에도 20대에도. 그런데 살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가 그 당시 꼰대들의 나이에 가깝다. 흑 무서워. 꼰대 싫어하던 청춘이 마침내 꼰대가 되었습니다는 옳지 않다. 젊은 꼰대라는 말도 생겼다고 한다. 꼰대가 나이의 문제만은 아닌가 보다. 그 시절 나는 그들의 어떤 점이 싫었지? 권위로 찍어 누르는 태도, 상명하복식 소통, 공감 능력 결여, 배려 결핍, 자기 중심주의. 쓰다가 놀랐다. 뭐가 이리 많? 저걸 다 어떻게 극복한담? 아무래도 까딱 잘못하다간 꼰대 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나만해도 나이를 먹으며 성숙한 주관이 생긴다기보다는 내 세계와 가치관이 편협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대로 나이 들다간 내가 바로 꼰대가 되겠구나 싶어 철렁할 때가 있다. 사회와 접점이 적은 주부라 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책을 읽는다. 나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그리고 대화의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잘 모르는 그 세상 이야기를 경청하려 노력한다. 아니, 그렇게 임하는 대화도 있다는 표현이 확하겠다.


이웃 중 A군의 할아버지가 있다. A는 큰 아이의 유치원 친구다. 할아버지가 평일 스케줄을 거의 전담하시는데, 어느 날 하원길에 A의 할아버지께 큰 동심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 A가 말이 너무 많아서 제가 좀 불편해요. A한테 말 좀 해주세요." 큰 동심이의 당돌함에 당황하여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할아버지께서는 "어, 그래. 그랬구나. 할아버지가 A한테 잘 얘기해볼게."라고 침착하고도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나중에 집에 와서 사정을 들어보니 A가 우리 아이를 붙잡고 "모모야, 내 얘기 좀 들어봐." 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데, 얘기가 너무 길어서 다 듣고 나면 같이 어울리려던 친구들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합류하려던 판이 사라진다는 거다. 얘기를 끊어봐도 "모모야, 내 얘기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들어봐." 하면서 결국은 끝을 본다고 한다. 큰 아이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내 자식(또는 손주)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선뜻 그걸 수용하고 부드럽게 반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할아버지께 감사했다. 벌써 두 해 전 일인데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 아니, 잊고 싶지 않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먼저 살갑게 인사해주시는 어르신들께도 감사하다.


세대차이는 필연이라 생각한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니 사고방식, 가치관 같은 것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공유할 게 많지 않은 다른 세대와 모든 면에서 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기에, 타협 불가한 지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에 문을 하나쯤 달아두는 것, 청자에 대한 배려 한 줄기 정도는 내어줄 수 있는 마음가짐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쿨내 나는 할머니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나이를 무기로 삼지 않으면서,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잃지 않는 어른으로 늙고 싶다. 그럼 어쩌면 꼰대가 안 될 수도 있지 않을까.







Photo by Maksym Kaharlytsky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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