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인가 고등학생 때였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선배 중 사법고시에 합격한 선배가 강연을 왔다. 요지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였다. 무엇을? 입시공부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니.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피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는 독려였다면 좋았겠다 싶었다.
최근 엄마에게 여쭤봤다. 엄마는 육아하고 살림하다 한계에 다다르면 어떻게 했느냐고. 엄마는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는 거지. 그땐 다 그러고 살았어. 엄마도 직장생활을 했었다. 그 시절, 나의 외조부님은 아들 딸 차별 없이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셨다. 남편의 주 6일 근무와 아내의 독박 육아는 기본값이던 시절. 외식할 곳도 마땅찮았으니,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방에 머물렀을 터 (어디 이뿐이었겠는가. 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이 거북했다. 그저 닥치고 할 일 하란 채찍질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건강한 자기 암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지친다고, 하기 싫다고 놓을 수 없는 일이라면. 이왕 해야 하는 거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게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는. 조금은 느슨하게 나 자신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 응원의 말이랄까. 해야 하는 일을 그저 해내는 것. 거북했던 말 한마디가 20여 년을 돌고 돌아, 마침내 어른이 된 내게 성큼 다가왔다. 강요가 아닌 수용의 다른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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