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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쑤루쑥 Jun 06. 2021

학교에 전화를 했다.

정글 탐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우리 부부는 요즘 말로 둘 다 '아싸'에 가까운데, 우리 집 큰 동심이는 '인싸'다. 나로서는 DNA의 변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친화력의 소유자라는 것이 선생님들의 중론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의 고충을 제법 일찍 겪는가 싶다. 인간관계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이제는 큰 동심이도 어렴풋이 안다. 절친과도 티격태격하지만, 둘 다 실수를 하면 사과를 곧잘 하며, 그러곤 또 찰떡처럼 잘 붙어 다닌다. 잘못은 본인들이 자각할 때도 있고, 보호자가 짚어줘야 할 때도 있다.


학기 초부터 유난히 부딪히던 아이 셋이 있었다. 그 아이들과의 관계가 항상 나쁘진 않았지만, 평균치는 먹구름이었다. 비아냥과 놀림, 잔혹한 농담, 그리고 마치 폭력 서클이라도 되는 듯이 누군가는 나쁜 짓을 친구에게 시키고, 명 받은 친구는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싫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대부분의 일이 정규 수업 마치고 방과 후 수업 시작 전 한 시간 남짓한 공강 시간에 발생했다.


여기서 저 모든 행동의 대상이 우리 집 큰 동심이었다. 그때마다 혹시 그 아이들과 다퉜는지, 너와의 사이에서 그 아이들이 기분 상할만한 어떤 일은 없었는지 아이에게 물었는데, 싸운 적도 없고 딱히 짚히는 일도 없다고 했다. 아이답지 않은 그 애들의 방식이 찜찜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섣불리 나섰다가 학교 생활에 득 될 리 없는 '유난한 집 아이'라는 오명을 아이에게 입히고 싶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내 아이를 포함해서 단체로 아직 서툰 나이라 걔들을 좀 지켜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실수인지 괴롭힘인지.


그러다 한 사건을 계기로 결심이 섰다. 멋모르는 아이들의 치기로 치부할 수 없는, 악의적인 괴롭힘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설사 우리 아이가 빌미를 제공했다 쳐도 그들의 행동엔 폭력성이 과했다. 좋지 않은 감정들로 들끓던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간의 일에 대해 전부 차분히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아이도 어머니도 너무 속상했겠다면서,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아서 내가 원하면 학폭위를 열 수 있다고 하셨다. 말로만 듣던 그 학폭위가 거론될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선은 선생님 선에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단 의사를 전달했고, 선생님께서 빠르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주신 덕택에 바로 다음 날 그 아이들은 본인들이 한 언행을 시인하고 큰 동심이에게 사과를 했다. 일련의 행동의 이유는 그냥 우리 아이가 싫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하굣길에 동심이는 그들 중 반까지 같은 한 친구와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후에도 걔들을 보면 모른 체하지 않고 인사를 그렇게 잘할 수가 없다. 으이그. 속이 없는 건지. 뒤끝이 없는 건지.


어느덧 아이의 단체 생활 경력도 N년차에 접어든다. 큰 탈 없이 잘 지나왔지만, 갈등이 생기는 경우 그 양상이 해가 갈수록 복잡해진단 느낌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작년엔 코시국 중 일상생활에 대한 제약이 더 많았던 터. 학교에 간 날이 정말 손에 꼽다 보니, 제대로 된 학교 생활은 올해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만 2학년이지 여러 가지 면에서 1학년과 다름없을 거란 생각으로 마음을 좀 굳건히 먹고 있었다. 뭐가 됐든 조금 더 세지겠구나 하고.


날 닮아 소심한 큰 동심이가, 살면서 마음의 상처를 덜 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친구관계에도 기복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널 좋아할 순 없다'라는 식의 얘기를 어릴 때부터 좀 자주 해왔다. 그게 '난 무조건 결백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상대 입장에서 상황을 되짚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인지 심각한 상황이었던 날에도, 성토와 눈물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금세 또 웃고 놀고 일과를 해냈었다. 그게 동심이에게 너무 고마웠는데 이젠 미안해진다. 시간을 두고 지켜본 덕에 내 판단에 확신이 섰고, 중재의 파급력이 더 컸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더 빨리 나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든다.


보호자로서 현재로선 나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했다. 하지만 이게 다다. 최대한 좋게 표현하자면, 잘못을 깨닫는 것에 무디거나 잘못인 걸 알면서도 남에게 함부로 휘두르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아이들이 달라져야 근본적으로 해결될 일인데,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까. 잠시 멈추는 정도면 어쩌지. 그러면 그땐 뜸 들이지 않고 즉각 학교에 다시 전화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하아, 잘 모르겠다.


아홉 살이면 잘못이 잘못인 줄 모르고 저지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잘못인 걸 알고 반성이나 사과를 한다면 그게 아홉 살의 최선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게 되는 아이인지 아닌지가 내게는 좀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다. 친구라면 그저 좋아하는 아이,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한 친구에게도 해맑게 인사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심경이 좀 복잡했다. 친구를 가려 사귀었으면 좋겠단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지 못했다. 이왕이면 너를 존중해주고, 소중히 대하는 친구들과 더 많이 교류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할 뿐이었다. 친구에게 서슴없이 다가갈 줄 아는 내 아이의 '기개'가 부디 오래도록 꺾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못지 않게 크기 때문이었다.  


사회생활 시절 '악당 질량 보존의 법칙'을 들어봤다. 'ㄸ'으로 시작하는 세 글자를 순화해서 표현했다. 가능하면 아이가 이런 일은 다시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심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게 현실일 거다. 사회생활은 정치와 전쟁에 비견되곤 한다. 완전한 적도 아군도 없는. 견고한 역학관계는 덤이다. 초등 학교생활은 '사회생활'이라기보다는 '단체 생활'에 가깝다 생각했던 내 착각을 뼈아프게 곱씹는다. 여기는 정글이다. 보호자로서 내 아이를 지킬 도리는 하되, 내 아이가 그 악당이자 무법자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다. 동심아, 네가 좋아하는 게임 '정글 탈출'에서는 순식간에 정글을 나가더라만.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느니라. 같이 헤쳐나가 보자. 이왕이면 씩씩하게.

 





Photo by Jonathan Mey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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