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있다.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지방 소도시의 시장을 지냈지만, 집은 가난했다. 공부를 잘했던 둘째 형은 서울로 대학을 갔고, 이후로 취직, 결혼 등의 과업을 하나씩 해치우며 자연스럽게 타지에서 머물렀다. 고향을 지키던 사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족들을 돌봤다. 어느 날, 큰 형 부부가 잠시 모시던 부모님을 자기 부부가 모시겠노라고 선언했다.
사내의 아내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낙천적이기도 하거니와 동창회장이나 부지런한 계모임 총무 같은 성격이라 집안 대소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내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낳았다.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물려 줄 재산은 없고 깐깐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한 집에서 모시고 살았다. 형제들은 대체로 제각각 살았으나, 동기간으로 인해 사내 가정의 평화가 위협받은 일도 있었다. 사내는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그들에게 기꺼이 가진 것을 내주었으며,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다. 자기가 일군 다섯 식구를 위해, 노모를 위해, 그리고...
사내의 아이들도 쑥쑥 컸다. 천성이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은 아빠 엄마처럼 바르게 자랐다. 시간이 흘러 사내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 무렵, 사내도 퇴직을 했고, 아내도 퇴직을 했다. 아이들도 하나씩 독립하고 제 앞가림을 하던 즈음이니, 이제야말로 평생 가족을 위해 고단했을 심신을 편안히 하며 아내와 노년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 가족에 집중하며.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내는 뇌를 다쳤다. 그리하여 둘째 형 장례식에도 부축을 받아서 왔으며, 사내의 장남 결혼식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내 자신의 첫 손주와 교감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뇌를 할퀸 상처는 극한의 슬픔도 극한의 기쁨도 앗아갔다.
둘째 형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두 조카 모두 제 아빠처럼 대학을 서울로 간 이후 타지 생활을 했다. 누가 뭐라기 전에 알아서들 척척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한 두 조카를 사내는 기특해했다. 사내는 말수가 없는 편이었지만, 두 조카는 자기들을 향한 사내의 애정과 신뢰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특히, 둘째 형 딸의 결혼식에서 사내가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사내의 사고 이후에야 듣게 된 결혼식 당사자는 억장이 무너졌다. 사내의 애정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다는 걸, 그 고마운 마음을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내가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내 작은 아버지의 이야기다. 둘째 형님이 내 아빠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산 아빠는 월급이 많지 않았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작은 아빠네와 본가에 도움을 주려 애를 쓰셨다. 내 가정을 일군 입장에서 보자면, 일반적으로 배우자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에게 평생을 미안해하셨다. 말년에는 갑작스럽게 당신 자신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도 모르고, 병상에 누운 동생 걱정을 그리 많이 했더랬다.
7년이 지나 사내는 둘째 형님을 만나러 간다. 말수가 적었던 형제. 하지만 껄껄거리는 빙긋한 미소가 꼭 닮았던 형제. 두 사람이 생전에 못다 푼 회포를 여유롭게 풀었으면 한다. 포옹까지는 잘 상상이 안 가지만, 손을 마주 잡는다거나 반가움을 가득 담아 어깨를 토닥이던 아빠의 손길이 떠오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막걸리 주안상이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둘째 형수는 소식을 듣고 참담하다. 사내가 가여워서 어쩌냐며 흐느낀다. 최근 병문안 한 번 다녀와야지 하고는 못간 게 후회스럽다. 오늘, 둘째 형수는 장례식장에 갈 것이다. 아파서 딸 집에 와있지만 노구를 이끌고. 오늘, 둘째 형님의 아들도 장례식장에 갈 것이다.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이렇게 저렇게 신경 쓰셨을 부분을 자기가 챙겨보겠노라며. 둘째 형님의 딸 또한 장례식장에 갈 것이다. 작은 엄마와 사촌들 손잡아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