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를 아시나요
빨간 구두가 날 부를 때
대학때 나는 탐스러운 다홍색의 세무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
굽은 2센티가 채 안돼서 단조로운 플랫슈즈같지만 탱탱하게 익은 여름 자두색의 세무 구두는 작은 리본 장식도 앙큼해보였다. 늦잠 잔 날은 1교시에 늦지 않으려고 청바지에 그 새빨간 구두를 신고 기숙사 3호관 신발장에서부터 튀어나가듯이 뛰쳐나와 강의실이 있는 2공대까지 HD광장을 가로질러 가곤했다. 그때 나와 같은 전공 수업을 듣던 선배는 미친듯이 뛰어가는 날 보고 '안데르센의 잔혹동화 빨간구두가 연상된다, 빨간 발목만 공중을 휘젓듯이 뛰는 모양새다' 라고 놀려댔다. 늘 우정을 가장한 험담 같은 괴랄한 농담을 즐겨하던 그이는 나중에 '남극의 눈물'을 거쳐 그 유명한 '나는 신이다'를 제작한 PD가 되었다.
빨간색의 구두는 동화에서도 여성의 욕망,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발심을 상징하면서 논란거리였지만 보수적인 기독교 대학에서 빨간색 세무 구두를 신고 휘적휘적 돌아다니던 나는 그 반항의 서사가 그때도 꽤나 마음에 들었었나보다.
이후 무지 외반증이 심해지면서 엄지발가락의 뼈가 점점 자극돼, 그 구두는 '너무 예쁘지만 발을 깎아먹는 신발' 꼬리표를 달고 얼마 못가 이별을 했다.
그 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온갖 구두와 신발을 시도했으나 이상하게 (아니 너무 당연한 이유로) 점점 내 신발장은 검은색, 어쩌다 흰색의 무채색 신발들로 가득찼다. 행사장에 오래 서있어야하고 정장에 어울려야하니 튀는 색의 구두는 탈락, 무조건 편한 신발로만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내 안의 무언가 반항의 심리가 꿈틀댈 때, 아직도 내 기억속에는 나의 첫번째 앙큼한 빨간 구두의 색감이 아른거린다.
얼마전 백화점 명품관에 전시된 구두를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음미했다. '저렇게 구조적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힐은 구두 주인의 발목을 서서히 죽이겠지. 그래도 신고 서있는 동안은 구두 코에 달린 아름다운 꽃장식을 보며 여왕이 된 기분일거야. 저런 신발을 실제로 사서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서 있는 공간과 시간은 어떤 상황일까?'
나는 탐스럽게 디스플레이된 구두에 홀린 채, 얼굴 없는 구두 주인의 탐나는 인생도 훔쳐 보는 기분이었다.
그뒤로, Puma 신제품 론칭 쇼케이스. 행사를 진행하면서 내 검색 알고리즘엔 Puma 운동화가 걸려있었는데 빨간색은 아니지만, 진달래색 세무 스니커즈가 60% 세일 꼬리표를 달고 떴다.
결제까지 별 고민이 없었다.
나는 원래 세무를 좋아하니까. 나는 튀는 색도 소화할 수 있으니까. 운동화라서 매일 신을 수 있으니까. 이제 곧 봄이니까. 게다가 천연가죽인데 39,000원 이니까.
운동화가 이미 여러개 있지만 진달래색 새 스니커즈를 사는 이유는 오조 오억개라도 댈 수 있었다. 그 중 제일 강력한 이유는, 나에게 빨간 구두의 기운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요새 계속 같은 주제의 꿈을 꾼다. 단체 유럽여행을 갔는데,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있는 그룹의 빡센 여행 일정 인솔과 끼니 해결까지 나 말곤 할 사람이 없다거나, 회사사람들과 함께 시상식에 초대 받았는데 나만 의상이 없다거나, 심지어 그 시상식에서 내가 상을 받는 사람인데 나만 옷이없어서 소매가 너덜해진 푸른 드레스를 입고간다거나, 수능 (망할..아직도 꾼다. 수능치는 꿈.)을 치는데 수리영역 문제의 글자가 계속 바뀌고 결국 수학을 말아먹는다거나...
억울하고, 버겁고, 내 책임만 무한증식하는 상황이 반복해서 재생된다.
그럴때마다 불편한 꿈의 잔상을 털고 진달래색 핫핑크 세무 스니커즈의 끈을 꽉 동여매며, 내 혈관속에 흐르는 반항, 반발의 기운을 모아본다. 구두는 아니지만 주문 외듯이 신발에게 말을 건다.
빨간 구두야, 빨간 구두야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렴.
자유롭고, 생기 넘치고,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곳으로.
너를 신고 뛸 때 마다 나에게 거친 지면을 딛고 호기롭게 튀어 오르는 탄성으로 반응해주렴.
너를 신고 춤을 출 때 아픔대신 내 발에 날개를 달아주렴.
나를 억압하는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새빨간 기운의 힘을 반기고, 나를 짓누르는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다투는 대신 내가 빨간 구두를 신고 거침없이 나의 길을 휘적휘적 걸을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다 괜찮아 질 것 같다.
걷고 뛰고 춤추는 동안 어디에든 닿아 있겠지만, 종착지가 아니라 가는 길에서 나는 자유롭고 아름다울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