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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Jan 18. 2023

Essay #1_눅눅함의 잔치, 페트리코

비 오는 날 흙 냄새

나는 기억한다. 

대지에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면, 공기 중에 가득 품고 있던 수증기가 아래로 내려가 가장 밑 바닥에 있는 흙을 적시며 뿜어내는 그 냄새를…… 마른 나무 뿌리를 적신 냄새 같기도 하고, 이슬을 잔뜩 모으고 있는 들풀 냄새 같기도 하고, 시원하면서도 눅눅한데 그 특유의 흙 냄새를 알아차리는 순간, 온 몸의 말초 신경에 전기가 통한다. 그리고 가본적도 없는 스코틀랜드의 광활한 대자연 속, 원시림이 가득 습기를 머금고 있는 깊은 숲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40여년을 사는 동안,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냄새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몽글몽글한 아기 살 냄새라고 하겠지만, 가장 강렬한 냄새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비 올 때 나는 흙 냄새라고 답할 것이다. 왜 나는 유독 이런 습한 대지 냄새에 끌리는 것인지, 이 냄새의 기원에는 어떤 강렬한 기억이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힘겹게 긁어 모은 첫 번째 기억은, 10살쯤 되었을 때 살던 동네의 오래된 아파트 1층에서 밖으로 나가기 직전, 지하에서부터 차곡 차곡 쌓여있던 농축된 비, 흙냄새였다.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던지, 좋아하던 과자를 사러 나선 길이었던지, 내 걸음은 발랄하고 재기 그지 없었을 텐데, ‘흐읍’ 하고 그 지하에서 올라오던 냄새를 맡는 순간,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 갑자기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습기, 이 정체 불명의 시원한 냄새가 사라질까 봐 내심 불안하기까지 했던 그 때의 기억이, 그 뒤 비가 올 때마다 몇 번 반복되었다. 


생각해보니, 비 오는 날 흙 냄새가 내 유년 시절에 강렬하게 남은 이유는 나는 아마도 ‘센치’해질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10살 이후 부모님의 사업은 2번의 부도를 맞으면서 학교까지 쫓아오는 빚쟁이들 때문에 나는 중2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외삼촌 집에 얹혀 지내고, 오빠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 가고, 아빠는 교도소에 가고 엄마는 다시 가족을 모아보려고 단칸방을 찾아 헤매셨다. 가족이 겨우 겨우 다 모이고도 경제적인 사정이 좋아질 일이 없었고, 부모님의 다툼도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할 뿐이었다. 누구에게는 가장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사춘기 시절이 나에게는 여는 문마다 그 뒤에 있는 좌절, 결핍, 억울함, 실패를 맞닥뜨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고2까지 학비를 내지 못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날에도 비가 오기를 아주 간절히 빌었었다. 나에겐, 비 오는 날이, 울 수 있는 날이었던 셈이다. 


비가 쏟아지기 전, 예고편처럼 대지 한 가득 피어 오르던 아지랑이 그리고 젖은 흙 냄새, 풀 냄새 왜 그리 포근했을까……마음껏 센치해져도 된다고, 우울해져도 된다고, 암담한 현실에 엎어져서 목놓아 울어도 된다고 날 품어주듯이, 비가 내리던 날 그 날의 습도, 온도, 공기, 그 속에 길 가다 멈춰서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온 영혼으로 느끼고 있던 교복 입은 17살의 내가, 그 강렬한 기억 한 가운데 서있다.        


 그래서 지금도 비 오는 날 흙 냄새가 풍길 때면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머물곤 했는데, 그 냄새를 처음 접한 시절의, 울고 싶지만 울 수 없었던 어린 소녀가 중년의 나를 찾아오는 시간이 돼 버린 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이제 9살이 된 큰 딸이 할아버지, 할머니 댁을 방문 하는 날,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하에서 나는 습한 냄새가 너무 좋다고 감탄을 하며, “엄마! 나는 이 냄새가 너무 좋아!”라며 외쳤다. 딸애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이미 감지한 그 습한 냄새가 나에게만 ‘의미 있는’ 냄새가 아닐까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내가 고이고이 숨겨놓은 애잔한 비밀이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 라든지 ‘어떤 냄새가 좋다고?’ 라고 되묻지 않고 (이미 딸이 어떤 냄새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나를 많이 닮은 큰애가 그 미묘한 향기를 알아 챈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어 그래,” 라며 짧게 수긍해주고 말았다. 


이 글을 쓰면서, 나처럼, 또 우리 딸처럼 ‘비 오는 날 흙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찾아보니, 왠 걸, 이런 냄새를 닮은 향수까지 나와 있었다. 게다가 기상청에서 이 냄새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해 놓은 글에 따르면, 비가 오는 날이면 풀 냄새 같기도, 흙 냄새 같기도 한 냄새를 공식적으로 페트리코, (바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petra에서 유래됨)라고 부른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비 냄새’인 페트리코는 비 자체의 냄새가 아니라 바위에서 생성된 냄새로, 바위의 작은 틈새 사이에 어린 식물들로 발산된 식물성 기름들이 빗방울과 함께 공기 중으로 분출되고, 그 풀 냄새가 주변에 퍼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실 비 냄새는 ‘바위’틈에 살고 있는 식물들의 기름 냄새인 것인데 딸 아이가 강렬하게 맡았던 지하 주차장에서의 그 냄새, 내가 10살 즈음 아파트 지하실에서 맡은 그 냄새가 왜 그리 진하게 기억에 남았는지 알 것 같다. 지하의 ‘돌’(바위)사이에 있던 냄새들이 갇혀있다 비가 오는 날 수증기 형태로 자유롭게 떠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나의 유년 시절과 비교하면 어떠한 형태의 ‘결핍’ (특히나 경제적인 면에서)도 없어 보이는 딸 아이에게 ‘비 오는 날 흙 냄새’는 울고 싶은 날 좋은 핑계라던가, 서럽고 애잔한 기억의 잔상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저 그 ‘너무 좋은’ 냄새가 풍기는 자연의 풍요로움, 정화의 의식, 온 세상을 적시는 위로의 물길만이 그 아이에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이 되지 못한 비가 잔뜩 통통해진 형태로 흩뿌리듯 내리고 있다. 얼른 우산을 들고 나서서 선물 같은 흙 냄새, 비 냄새, 풀잎 냄새의 잔치를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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