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이기는 힘은 탐닉이다.
이번 설연휴 때 친정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내려가면서 여러 풍경과 이미지를 봤지만, 센텀 신세계 백화점 젠틀몬스터(선글라스 브랜드)에서 설치한 로봇 구조물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잔상이 오래 남았다.
백화점 지하 한 층의 높이를 다 차지할 만큼의 엄청나게 큰 사이보그 얼굴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비노 백인 여성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창백하고 흰 피부의 거대한 로봇 얼굴은 홍채와 안구 주변 피부까지 움직이도록 구현해 놓았다. 그리고 얼굴 뒤쪽엔 족히 1미터는 넘을 둘레의 굵고 시커먼 전선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아시안도 흑인도 남미인도 아닌 투명한 백인여성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뒤통수 가득 달려 있는 시커먼 전선다발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외계인의 유기체 다리(?) 같은 느낌이었다. 과대망상 같지만 시고니 위버가 출연했던 고전 영화 에일리언의 그것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그로테스크하고 압도적인 설치물을 보고 있자니, 관람객이 자신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형물이 관람객을 '의도'를 가지고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끔 만든 이의 '속내'가 조금씩 보였다. '변태'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실제 사람의 피부와, 속눈썹, 홍채의 투명한 무늬까지 똑같이 재현해 놓고선,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이 싸이보그 같은 로봇의 실체는 차갑기 그지없는 철기둥과 어마어마한 양의 전류가 흐를 것 같은 케이블 덩어리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 이 구조물을 기획하고 만든 이는 (물론 여러 사람의 합작품이겠지만) 관객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소름 끼치며' 자신의 걸작품을 감상하길 바랐던 것일까? 내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입이 벌어지며 넋을 놓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갑자기 이 로봇 조형물이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려 홍채를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며,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조형물의 이름은 '자이언트 헤드'이고,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오묘한 표정'을 짓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그 순간, 나는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단어가 떠올랐다.
'탐닉'...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집중하는 순간, 피아 구분이 의미가 없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오로지 집중하는 대상과 집중하는 이만 존재하는 순간이다. 영어론 indulgence라고 쓸 수 있을 텐데, 나는 indulge in이란 동사 형태가 더 어울린다고 느낀다. 어딘가에 빠져드는 '장소'를 연상하는 전치사 'in'이 들어가면 한자로 '몰아'(沒빠질 몰我나아), 무언가에 빠져서 '자신을 잊은 상태'를 뜻하는 한자와 딱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in-dul-ge'라고 소리내서 읽으면, 그 발음이 음성학적으로도 이미 무언가에 푹 잠겨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젠틀몬스터가 파격적인 조형물 전시로 유명한 브랜드 (인천공항 면세구역 안에 전시된 커다란 검은 거미 (심지어 두 마리) 구조물도 젠틀몬스터에서 만든 것)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장 인위적인 AI, 인공지능을 사람의 모습으로 만든다면 이런 이미지의 집합체일 것 같은 구조물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난, 오로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순도 10000%의 상상력, 창의력이 폭발하는 순간인 '탐닉'을 느꼈다.
이 구조물의 개발자는 대형 로봇 얼굴의 속눈썹을 구현하면서 얼마나 많은 '정지된 시간'을 보냈을까? '비인간성'과 '인간성'을 극단적으로 대조해서 보여줄 최고의 '창조물'을 구현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있었겠지만, 차가운 금속위에 실리콘으로 덧댄 로봇이 자신을 지긋이 쳐다보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순간, 결국 자신의 '탐닉'이 성공했다는 걸 알고 전율이 일었을 거란 상상을 했다.
어떤 이들은, 과연 이 소름 끼치도록 실제 같은 로봇 구조물이 선글라스를 만들어 파는 '젠틀 몬스터'의 매출 증대에 무슨 직접적인 영향을 주겠냐고 묻겠지만, 인간의 말도 안 되는 상상력과 변태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거대한 구조물로 생생하게 물화 된 것을 보며 나는 '탐닉'이 가진 위대한 힘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진보'는 인간만이 가진 이 '탐닉'에서 나온다. 앞뒤 재지 않고, 지금까지 몇 번의 실패를 했는지 세지 않고, 그저 내가 지금 상상하고 꿈꾸는 일이 '실현'되는 것이 몇 만배 더 강렬하고 간절했기에 이룬 수많은 인류의 성취.
전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 비행기를 처음 날렸을 때, 컴퓨터가 처음으로 가동됐을 때 그랬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끼니를 해결하기 힘들어도, 지금 하고 있는 물감 칠, 잘 되지 않는 구간을 몇 만 번 반복하는 바이올린의 활질 등 수 없이 많은 '정지된 시간'이 억만 겹 쌓여서 이뤄졌을 것이다.
요즘 나에겐 글을 쓸 때, '탐닉'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아주 가까스로, 힘겹게 말이다.
3초짜리 숏츠가 범람하고, 시즌 3개를 40분에 압축해 주는 드라마, 영화 요약 영상이 차고 넘치는 요즘, 도파민 중독자인 나는 무언가를 '앞뒤 재지 않고' 집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로 한 이후, 주 1회 발행일이라는 데드라인을 잡았지만 매번 '이번엔 진짜 못쓰겠어. 머리가 텅텅, 가슴도 텅텅, 아무리 쥐어짜도 이번엔 진짜 안돼'를 속으로 외치며, 벼랑 끝 전술로 자신을 내몬다. 그러다, 글이 1/3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내게도 탐닉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냥 쓰는 행위에 집중할 뿐, '내가 이걸 써서 뭐 하나', 의 무한루프에 빠지지 않는다. 절반을 넘어서면 당 떨어진다는 핑계로 갖다 놓은 과자나 초콜릿에도 손이 안 간다. 그저 이 글을 빨리 완성시켜야겠단 의지와 타다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즉각적인 자극, 소비에 더 취약해지는 자신을 마주할수록, 나를 형성해 온 이 '탐닉'의 힘이 더 귀해진다.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땐 물론이거니와 체르니에 들어서서도 손가락의 힘이 부족해 나의 연주는 수없이 건반 위에서 뭉툭하고, 괴상한 소리들로 가득 찼을 텐데 그 뒤로도 나는 이상하게 내 욕심대로 피아노 연주를 잘하지 못해도, 잘 안 되는 소리만 집중 연습할 뿐 능숙하지 못한 것이 속상하지 않았다. 완전히 자신을 잊은 채 피아노와 연주하는 나만 존재하는 순간을 '탐닉'했던 그 무수히 많은 세련되지 않은 시간들이 결국 찬란히 빛나는 선율을 만들어 낸 것을 이제야 새삼 알게 되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영어 실력이 느는지 저울질하면서 공부했다면, 영어를 이용해서 밥벌이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저, 내 귀에 유려한 음악처럼 들리던 이국적인 억양에 매료돼서, 똑같이 한번 따라 해보고 싶다는 순수한 욕구에서 출발한 영어학습이 결국 '탐닉'에 이르게 해 주었다.
내 삶의 어떤 작은 성취라도, 그 별 볼 일 없는 '탐닉'이 억만 겹 쌓여서 이뤄진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탐닉'이 점점 더 희소해진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걱정이 너무 많고 조잡한 잇속은 더 치밀해지며, 미래 계획을 세워볼라치면 3초 만에 머릿속엔 냉소와 비아냥으로 가득 차버린다. 도파민 중독자의 소비지향적인 하루하루가 쌓여서 그렇게, 새해의 한 달을 까먹어버렸다.
음력으로 맞이하는 새해에, 우연히 마주친 다소 그로테스크한 쇼킹한 비주얼의 구조물이 내게 '새로운 탐닉'의 영감과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AI 음성이 나온 이래, 반 이상 줄어든 성우 일과 직격탄을 맞은 통번역 등, 나에게 AI와 인공지능은 '인류종말'과 같은 파급력을 지닌 단어였는데, 이 구조물을 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가장 AI 스럽고, 가장 인공적이고, 가장 비인간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낸 것은 결국 인간만이 가진 지독한 상상력과 '인간스러움'이 아니던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은 가장 '비인간적'인 창조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더 빛이 났다. 소름 끼치게 차가운 로봇의 표정을 통해, 나는 그 완벽에 가까운 '정교함'과 '상상력'을 불어넣은 인간의 '뜨거운 탐닉'의 시간에 경의를 표한다.
상상력과 집중이 폭발하는 정지된 시간, 그 몰입의 순간을 더 이상 평가절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믿고 싶다. AI, 인공지능의 세계에 둘러 쌓여 있어도 '인간다움'을 놓지 않고, 내 안에 아름다운 것을 탐닉하고자 하는 깊은 즐거움, 유희를 지긋이 들여다보면서 나만이 가진 특권, 지금 하고 있는 생산적인 '탐닉',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미래의 '탐닉'에 지지와 응원을 미리 보내본다. 그 탐닉의 결과물이 어떤 것이든, '자이언트 헤드'의 입이 떡 벌어지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인간적인' 상상력의 창조물이 었으면 좋겠다.
*2023년, 젠틀몬스터 관련 기사 중 발췌
"매장 중앙에 위치한 ‘자이언트 헤드’는 고요하고 정적인 움직임을 통해 마치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한 감정을 경험하게 하는 대형 키네틱 인스톨레이션이다. 젠틀몬스터 관계자는 “‘자이언트 헤드는 젠틀몬스터 로봇랩에서 1년여간의 연구로 만들어진 작업으로, 이를 통해 ‘미래의 로봇과 인간의 관계성이라는 메시지를 고객들에게 질문하려 한다”고 전했다."
기사 전문
출처 : NBN미디어(https://www.nbntv.kr), https://www.nbntv.kr/news/articleView.html?idxno=308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