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聖과 俗)
Indulgence (탐닉)는 제 인생의 키워드인데, 그중 피아노에 탐닉하며 있었던 에피소드를 시리즈로 공개하려고 합니다. -
내 인생에,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의 사건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 였던 것 같다. 성적 장학금을 받아도 엄마의 곗돈으로 이미 휘발되고 없는 다음 학기 등록금 걱정에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겠다 싶었다. 낮엔, 엄마 친구 초등학생들 영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피아노를 쳐서 돈 벌 궁리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주중에 돈 될만한 건 다 활용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자니 피아노 전공이 아니어서 할 수가 없고, 피아노 치는 기술로 돈을 번다는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내 상상속엔 칵테일 Bar를 새로 여는 젊고 센스있는 사장님이 나랑 우연히 부딪쳐서 얘길 나누다 일자릴 얻는다는 로또 당첨 확률 같은 부스러기들만 존재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 하지 않고,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부산 광안리 바닷가 주변의 카페나 Bar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정말 내 눈앞에 피아노 연주자를 구한다는 공고가 보였다.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3층의 주점이었다.
불법만 아니면 돈 되는건 다할 수 있다는 패기의 나는, 어두침침하다 못해 뿌얘보이는 조명 아래 오래 묵힌 카페트와 매캐한 공기가 가득한 주점에 선뜻 들어섰다.
낡아 빠진 업라이트 피아노 한대가 무대 옆에 찌그러져 있는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자, 짧은 숏컷에 짙은 화장,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나는 저지 드레스를 입은 40대 여사장이 나를 머리에서 발 끝까지 한번 훑더니 피아노를 한번 쳐보라고 했다.
오래된 먼지와 술 그리고 어디선가 분명히 창렬하게 퍼져있을것 같은 곰팡내가 뒤섞인 공간에서, 여사장의 커다란 금색 링귀걸이가
그녀가 움직일 때 마다 짤랑 소리를 내며 조악한 조명에 번쩍였다.
나는 쭈뼛대며, 피아노 악보대에 있던 '가요모음집'을 펼치고 눈에 들어오는 아무 곡이나 쳐댔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평생 교회에서 CCM반주만 했던 나도 알만한 곡이었으니 '돌아와요 부산항에', '무시로' 이런 류의 곡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 전공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제일 돈을 잘 벌던 시절 개인 교습 선생님을 모셔와 제대로 테크닉을 배웠던 나는 클래식 보다는 Jazz피아노 스타일을 더 하고 싶었다. 전공을 하라고 권하는 선생님께는 야심차게, 피아노는 취미로만 치겠다고,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는기회비용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후, 2번의 사업 부도로 집안이 풍비박살난 걸 생각하면 전공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다. 그러나, 음악은, 특히 피아노는 내 영혼의 일부분이자 나를 다른 세계로 옮겨주는 매개체였다.
엄마가 팔던 가구와 바꿔서 가져다 준 나의 첫번째 독일제 업라이트는 빨간 딱지와 함께 압류품으로 사라졌지만, 피아노를 아끼고 그리워한 마음은 더 진해졌다.
그 뒤로, 교회 외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에 나는 거의 평생을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사람으로 지냈다. 가장 성스러운 공간과 시간에서, 나를 영원의 세계로 이어주던 피아노가 가장 세속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밥벌이 용도로 쓰인다는게, 왠지 모를 죄책감과 수치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짙은 아이라인에 껌을 아무렇게나 씹고 있던 여사장의 입에서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내가 가진 테크닉을 다 보여줘야 한단 절박함에 내 평생 가장 화려한 뽕짝을 연주하지 않았나 싶다.
잠깐의 시연이 끝나자, 여사장은 피아노 연주에 대한 내 걱정과 달리, 어리바리 순진해빠져 보이는 여대생인 내 신분이 더 걱정이었는지, '여긴 사람들이 와서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하는 곳인데, 손님들이 신청곡을 쳐달라고 할 때도 있고 좀 거칠게 굴 때도 있다. 그런 것도 괜찮은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때만 해도, '거칠게 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잘 안될 정도로 나는 순진했고, 당장 등록금이 더 급했기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3번, 밤 8시부터 11시까지 광안리의 그 주점에서 피아노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광안리 해변가 3층 주점에서 영화에서나 보던 치정, 사랑과 전쟁, 피가 낭자하는 상상초월의 사건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되었다. 물론 주인공은 묘하게 관능적인 쇳소리와 육감적인 상체와 대조적으로 부러질듯이 가느다란 발목을 가진 그 여사장이었다.
피아노가 있는 무대 뒷편에는 커텐으로 가려진 주방이 있었는데, 그 곳엔 키는 크지 않지만 다부진 몸매에 말수가 별로 없고 머리 숱도 별로 없으신 남자 주방장이 있었다.
그 분이 남자 사장님이란 건 나중에 나보다 2살 어린 서빙 남자 알바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때 그 커텐이 열릴 때 마다 나오는 과일 안주의 화려한 플레이팅을 보면서 지금 나가는 안주가 '양주'용인지, '맥주'용인지 분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님이 들어올 때 마다 여사장의 부산 사투리가 묘하게 어우러진 콧소리의 향연을 들을 수 있었다. 저렇게 낮은 쇳소리의 여자 목소리도 '간드러지게' 나올 수 있다는 게 매번 신기했지만, 더 신기한 건 이 주점에서 일하고 있는 인물들의 관계였다.
서빙 남자 알바생은 노랗게 머리를 염색하고, 새까맣고 선이 무지 굵은 사자 눈썹을 하고 있었는데 (눈썹은 염색을 하지 않았다.) 남자애가 웃을 때 마다 눈웃음을 쳤다. 남자 알바생은 나에게도 무지하게 싹싹하게 굴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저렇게 곰살맞게 구는 것도 재주다 싶었는데 그 애의 눈웃음이 범상치 않다 느낄 때 쯤, (아마 출근한지 1주일 지났나보다) 남자애가 사실은, 여사장이 자기 엄마라고 했다.
아... 그 애의 눈썹은 여사장의 눈썹과 꼭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웃음도.
그리고, 목소리 몇 번 들어보지 못한 남자 사장님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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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