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聖과 俗)
2부
그리고, 목소리 몇 번 들어보지 못한 남자 사장님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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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애의 아버지였다.
이혼을 한 상태이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일한다는 남자애의 설명에도,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날엔 안 그래도 많지 않은 손님들이 더 뜸해지는데 그런 날엔 여사장은 늘 자기가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아서 전화를 돌렸다.
"어머 엉~ 사장님, 요새 바쁘신갑다. 와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드노, 언제 올꺼야앙.. 이번 주에 놀러 오세요, 은제 올끈데? 목요일?"
그녀는 전화하는 내내 탁자에 놓인 옥색 재떨이를 줄담배로 채웠다. 그렇게 담배와 간드러진 쇳소리의 향연이 계속 이어지다가 수화기 속 주인공이 정말로 가게에 나타나면, 여사장은 버선발로 뛰어 나가듯이 문가로 쫓아 나와서는 팔짱을 끼고 손님 시중을 들었다.
나는 여사장 목소리가 간드러질수록 피아노 뒤 커튼에 가려진 어두운 주방에 혼자 있을 남자 사장님의 존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쩌다 그가 헛기침을 할 때면 내가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애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내 머릿속엔 이미 이 실시간 '치정 소설'이 중반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애인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동네 건달이상일 수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긴소매 사이로도 슬쩍 비치는 팔뚝의 문신, 쩔렁대는 금 사슬 목걸이까지, 그의 시커먼 피부에 바짝 깎아 올린 머리 (일명 깍두기), 그리고 늘 들고 다니던 가죽 장지갑을 보면 지은 죄가 없어도 옆에 있다가 한 대 맞을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여사장을 찾아왔다. 와서 떡이 될 때까지 술에 취하기도 하고, 이미 인사불성이 돼서 들어오기도 했다.
그가 술에 취해서 오는 날이면, 피아노 치는 나에게까지 시비를 걸까 봐 나는 잔뜩 긴장 한 채 영혼 없이 건반을 두드리며 시간을 죽였다.
나는 그 주점을 딱 두 달을 다녔는데, 첫 한 달엔 여사장이 '경고'(?)했던 '거친 일' 비슷 무리한 일들도 있었다.
술 취한 남자 손님들이 내가 모르는 곡을 쳐달라고 할 땐, 모르는 곡이라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다른 곡들을 쳤는데 불쑥 피아노 쪽으로 와서 소릴 지르기도 하고, 내 몸 쪽으로 붙을 때면 싫은 티를 내며 피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여사장의 (남사장의 아들이기도 한) 아들 아르바이트생이 와서 눈치껏 날 방어해 줬다. 알바 생은 그 남자애 말고도 약간 살집이 좀 붙은, 나보다 4살가량 어린 여자애도 있었다. 그 애는 주로 서빙을 하고, 계산을 하고, 손님이 없으면 나와 남자애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키는 작지만, 긴 생머리, 하얗고 투명한 피부, 지나가다 한 번씩 돌아볼 법한 선이 굵은 이목구비의 전형적인 미인상, 그리고 익숙한 검고 짙은 사자 눈썹. 웃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지어지는 매력적인 눈웃음. 그렇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의 누나이자, 이상한 관계의 남, 여 사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부산대를 다닌다고 했다. 부모의 인생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야무지게 꾸려나가는 나보다 1살 많은 언니였다. 이 언니는 부모님의 주점에 자주
나타나진 않았다. 아주 바쁠 때 만 가끔 와서, 서빙도 하고 청소도 도와주곤 했다. 여사장은 자신과 닮지 않은(?) 딸을 무진장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내가 이 언니를 신기하게 여겼던 건, 늘 어두운 주방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자신이 가진 모든 친절함과 특유의 애교로 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자 사장님의 목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밥 먹었냐'란 지극히 일상적인 말에도 그녀를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
이 내공 만랩의 언니는,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을 했든지, 엄마가 애인이 있든지, 그것도 아버지가 뻔히 보는 앞에서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최소한 내가 볼 때 자신의 엄마 아빠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애교'가 집안 내력인 것인지, 노상 부모님께 무뚝뚝한 나는 이 언니가 무슨 속으로 저렇게 사나, 볼 때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점에서의 시간이란, 힘들게 노동을 해서 지나가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대부분 오늘은 취객이 없으려나, 험한 일 안 당하려나를 늘 전전 긍긍하며 보냈다. 처음의 목표(?)였던 피아노 알바는, 무슨 곡을 치든지, 치다가 틀리든지, 조성진이 와서 울고 갈 법하게 치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영혼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내 피아노 선율은, 취한 손님이 바닥에 흘려버린 술 찌꺼기와 자욱한 담배 연기처럼 그 주점의 어두침침한 소품의 일부였다.
나는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늘어지게 치면서, 치기 어린 비애에 잠기곤 했다. 가끔 내가 치고 싶은 Misty 같은 재즈곡을 몰래몰래 치기도 했지만, 결국 눈치를 보며 트로트 10곡을 연달아 치다 오던 날도 있었다.
명목은 피아노 알바였으나 나는, 이 주점의 등장인물들과 라포가 쌓일수록 갑자기 단체 손님이 오는 날엔 술을 같이 날라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술집에서 알바를 한다는, 뭔가 찜찜하고 떳떳하지 못한 기분과 노란 머리의 남자애, 말은 거칠지만 나름 눈치는 있는 여자애, 가끔 오는 내공 만랩의 '언니'까지, 4명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쌓는 찐득한 동료애까지, 아무 사고 없이 하루를 보내길 같이 바라는 마음과 월 40만 원이란 나름 큰돈을 번 단 자부심까지 혼재했다.
어느 날은, 내일은 당장 그만둔다고 말하려다, 이 일 아니면 어디서 40만 원을 벌까 하는 암담한 심정에 또 아무 말 못 하길 반복하면서
그 일이 벌어졌다.
평소에도 말과 행동이 거친 여자 사장의 애인이 자신의 똘마니들과 함께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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