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sabotage
왜 우리는 기어코, 자신을 망쳐놓는가?
'사보타주' (Sabotage)란 단어를 한국어와 영어로 처음 알게 됐을 때의 상황은, 같은 단어인데 전혀 상관없는 뜻과 맥락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사. 보. 타. 주'(사보타주, 싸보타쥬라고도 쓰지만 정확한 외래어 표기법은 '사보타주'이다)라고 한글로 명료하게 인쇄된 책에서의 뜻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노동쟁의'를 뜻했다. 나는 '사. 보. 타. 주'를 중학교 1학년 즈음, 베란다에 처박힌 아빠의 갱지에 세로줄 글씨로 써진 책들 속에서 처음 접했고, 사전을 뒤져도 이 단어가 가진 물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막연히 노동인권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에서 일찍이 발달한 개념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사보타주'가 sabotage가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미드나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하면서였다. 주로 남자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파트너나 남편, 아내와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와중에 바람을 피운다거나, 싸움을 건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내뱉는 말이었다.
"I'm not (self) sabotaging my relationship."
사보 타지? 내 결혼생활이나 연애에 파업을 하는 게 아니라고?
드라마와 TV의 맥락에서 알게 된 이 단어는 '노동쟁의'에서 파생되긴 했으나, '파업, 태업'의 어감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와닿지 않는 뜻을 품고 있었다.
sabotage: to spoil someone’s plans or efforts in order to prevent them from being successful
actions that damage or destroy something
캠프리지 사전에 따르면, sabotage는 성공하기 직전, 일이 잘 돼가는 순간이나 상황에 '망쳐놓는' 것을 말한다. 즉, 누가 봐도 매력적인 외모에, 아이들을 잘 보살피며, 가정에 충실하고, 자신의 커리어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완벽한 배우자나 파트너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거나,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까지도 품어주는 상대를 두고 떠난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때 쓰는 말인 것이다. 또는, 그런 행동이나 결심을 하기 전에 베프에게 늘 물어보는 말이기도 하다. "Am I self-sabotaging my relationship now? (내가 지금 관계를 스스로 망쳐놓는 걸까?)
그런데, 프랑스에서 왔다는 이 이국적인 어감의 '셀프-사보타주'는 생각보다 나의, 우리의 일상에 너무 쉽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내 경우 비슷한 맥락에서 예전 남자 친구가 안 떠오를 수가 없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멀쩡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 주식으로 인생 역전을 해보겠다고 빚을 많이 내서 투자했지만 역시나 폭망이었다.
그 많은 빚을 갚으려면 안정적인 회사에 성실히 다녀야 했으나 결혼 얘기가 나올 즈음,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보험 설계사 일을 하겠다고 했다. 모아둔 돈은 없고, 갚아야 할 빚만 있고,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사람이지만 나도 벌면 되니까 사람만 괜찮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해진 월급만 받아서는 '빨리' 빚을 갚거나 뭔가 크게 '한 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영업'이라도 해야 희망이 생긴다고 결론을 냈던 것이다. 나는, 그가 힘들게 빚을 갚으면서 다시는 주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안의 '한탕주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단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관계를 'sabotaging'하는 게 무엇인가 절절히 느꼈다. 아니면, 전 남자 친구가 날 놓아주려고 일부러 그런 악수를 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8살 그때의 나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은 의미가 없었기에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사에 사표를 냈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내가 그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거나, 인연이 아니었거나를 잴 틈도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한 달쯤 지나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전 남자 친구가 'sabotaging' 해 준 덕을 톡톡히 보긴 했다.
사실, 'self-sabotage'란 개념을 알게 된 이후 이런 관계에서의 사보타주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망쳐 먹는 습관'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는 아이러니이다.
왜 우리는 성공 직전 '깽판'을 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유니콘 같은 배우자를 곁에 두고, 가시 밭길로 들어서는가?
왜 우리는 누릴 수 있는 행복, 따뜻하고 안온한 상황을 제 발로 걷어차는가?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험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어렵게 입학한 대학에서 베프로 지낸 기숙사 방순이(룸메이트)에게 그 당시 고민을 토로하면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자격지심과 콤플렉스를 드러냈다. 위로와 공감을 기대했던 내 바람과 달리 베프는 "언니는 왜 자꾸 스스로 불행해지려고 해?" 라며 돌직구를 던졌다. 그때에서야 나는,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망쳐먹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단 것을 처음 직면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self sabotaging은 '성공'이후의 부담감(성공은 현재를 벗어난 변화를 가져오고, 변화는 곧 불안을 야기하니까)을 못 이겨서 포기하는 심리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학대나 부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 '인정', '성공'등의 감정이나 성취 앞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기 방어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처 입은 자아는, 오랜 시간 '자기 파괴', '자기 패배', '자기 공격'의 방식을 내재화한다. 이 심리적 다이내믹은 무의식 속에서 '반복적으로', '셀프 사보타징'을 하도록 유도한다.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는 실패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유니콘 같은 파트너의 손을 놓고 싶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 안의 충동적인 무언가가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선택을 하라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베프가 나에게, 그 당시 내가 선택한 '어쩔 수 없이 더 힘든 방법'말고도 다른 가능성과 관점을 제시했을 때, 나는 내 안에 '더 나은 선택지'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한단 사실을 발견하고 많이 뜨악스러웠다. 바닥을 벅벅 기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자기 연민, 자기부정, 절망감을 뒤집어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내안에 있단 사실 만으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 뒤로 20여 년이 흘렀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또는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려고 할 때마다 내 안의 균형과 이성을 찾고자 하는 단어가 'self-sabotaging'이다. 그 덕인지, 다행히 나는 속된 말로 '지팔지꼰' (자기 팔자 자기가 꼬우는(망쳐놓는))의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다.
한탕주의에 인생을 거는 전 남자 친구의 치부가 레이더에 걸려서 잘라 낼 정도의 이성은 있었지만, (그때 나는 결혼을 해야 한단 강박이 꽤 심했는데, 그 와중에도 '더 나은 옵션'을 기다릴 용기와 확신이 있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거나,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게'되는 상황이 되면 자기 비하를 하면서 스스로를 끌어내리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상황이 호전되고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되어도 그 상황을 누리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어려운 도전을 시작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재 위에 앉아 '내 인생은 왜 이모양인가' 한탄하다 보면 알 수 없는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당장 나에게 누군가 로또 1등을 쥐어주면서 가지라고 했는데, 거절하는 식의 '사보타주'를 하진 않지만, 요즘 지극히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일상의 호수에 다시금 돌을 던지려고 하는 욕구가 인다. 프리랜서의 숙명이 '불안정성'인데, 액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예측 가능한 일을 일정하게 해내지 못하면 내 안의 '사보타주'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경력과 고군분투는 다 쓰잘데 없는 발악이었으며 어차피 안될 일이었으니, 이제 '새로운'이라 쓰고, '괴롭고 힘든'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라고 속으로 수천번 씩 되묻는다.
갚아야 할 대출 이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당장 생계에 쪼들리며 살지도 않는데 초록창 검색란에 쿠팡 로켓 프레시백 세척 알바를 끊임없이 찾아본다. 편식 심한 아이들을 위해 공들여 장보고, 오래 삶아 쓴 수건을 따로 정리해서 걸레로 만들고, 아이들의 학원을 알아보고, 인기 있는 문화센터 수업의 빈자리를 문의하러 직접 사무실로 방문해야 하는 시간이 '사치스럽다'라고 느껴진다. 초등 딸아이 둘을 키우는 40대 엄마의 이 모든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들이 무언가 더 '생산적', '고부가가치'적인 일을 하면서 '겸해야'하는 것이지, 일상적인 행위만 하는 것은 '직무유기'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뻗치다 보면, 글을 쓰거나 영어잡지를 필사하거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같은 책을 읽는다거나 할 때 죄책감이 느껴진다.
'사죄해야 할 대상'도 없는 죄책감.
최근 해외 프로젝트에 보낸 성우 오디션에 다 떨어지고, 스팸으로 가득 찬 메일 함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폭발할 듯이 머리에 가득 들어찼다. '자기 효능감'이 떨어질 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내가 단단히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오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렇게 내가 만든 비참하고 황폐한 지하 50층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한줄기 빛처럼 이 단어가 떠오른다. 'self- sabotaging'.
왜 나는, 내 인생에 따뜻한 햇살이 비칠 때마다 끔찍한 색깔의 제일 두꺼운 암막 커튼을 처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새벽과 밤에 지옥철에서 오징어가 되어 출퇴근하지 않고, 아이들을 쫓기듯이 등교시키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아침에 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 이후 내 생애 처음으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나는 왜 생업전선에 처절하게 뛰어 들어서 손목이 아작 나거나, 허리가 휠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고 압박감을 느끼는 것일까?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불안이 성취나 성공을 만드는 자극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내 커리어를 '열심히', '고군분투' 하면서 이룰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임에는 틀림없다.) 언제까지 이 불안을 연료로 태울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불안은 내 현재를 '망쳐 먹는' 부정적인 기운의 근간이다. 커리어가 바랐던 만큼 승승장구하지 못했었도, 예상하지 않은 시점에 '엄마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해도 일상의 모든 시간을 '사보타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돌이켜보니 내가 내 무사안온한 일상을 '사보타주'하는 동안, 나는 그 불안의 기운을 생산적인 결정을 하는 것에 단 1그람도 쓰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부정적인 감정만 먹고 마시느라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나마 이렇게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했다'라고 기록할 수 있는 기운과 정신이 든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내일도, 눈을 뜨면 무사안온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딸아이 이마를 쓰다듬어 주면, 꽁알 거리며 일어나고 새벽 배송으로 도착한 귤이 둘째가 딱 좋아하는 단 맛을 내는지 내 입에 넣어서 확인해 보고, 옷 고르기 난리굿한바탕을 하고 나서 우당탕탕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찾아오는 적막감을 사보타주하진 말아야지.
지금이 내게 합법적으로 주어진 가장 사치스러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사치스러운'이 나와 안 어울리고, 어울려서도 안되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온전한 엄마의 손길로 그득 채워줄 수 있는 '사치'라면, 그 풍요로움에 흠집을 내고 망쳐먹으려는 생각은 이제 버려볼까 한다.
찰나의 감사로, 한 치 앞을 나아가는 용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