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뭐, 저, 점쟁이야? 어떻게 손목만 만져보고 알아?”
“어릴 때부터 해왔으니까요. 다행히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초들을 알아요. 갖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맛이 엄청 쓸 거예요. 재경씨가 마음 단단히 먹고 꾸준히 먹어야 낫는데.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뭐 어린애인가? 쓰다고 안 먹게.”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하는 재경의 손을 살짝 잡아준 뒤 연아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윤숙과 지훈이 문 앞에서 어미새를 기다리던 아기새들마냥 연아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시에 물었다.
“어때요? 우리 재경이.”
“나을 수 있나요?”
연아가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툭하면 쓰러지지는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아는 아까 씻기 전에 김여사에게 소중히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던 보따리를 넘겨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연아를 지켜보았다. 당연하게도 연아는 이 사람들이 얼마 전 재경을 위해 굿을 했다는 걸 몰랐으며, 대왕신이 자신에 대해 예언했다는 것도, 따라서 이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만약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머물 곳이 있건, 없건, 당장 도망쳤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연아는 차분했다. 거실 바닥에 보따리를 조심스레 풀고, 그 안에 또 차곡차곡 종이로 싸인 약초들을 몇 가지 골라냈다. 종이를 걷어내니 온 집안에 한의원 약방 냄새가 풍겼다. 어쩐지 전문적인 포스에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가지털범눈, 이건 찬 성질이라 좀 누그려 뜨려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아! 혹시 생강이 있나요?”
김여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요리용 생강가루는 있는데!”
“가루? 하지만, 통생강이 좋은데요.”
윤숙이 물었다.
“얼마나 있으면 될까요, 연아양?”
“곰팡이 나지 않은 깨끗한 것으로 다섯 톨이 필요합니다.”
윤숙이 김여사에게 말했다.
“빨리 백화점에 가서 통생강 구해와요. 김여사가 직접, 제일 좋은 걸로.”
“네, 사모님!”
얼마 후 연아는 부엌에서 전기 약탕기에다 약초를 하나씩 넣고 있었다.
‘원래 내가 쓰던 약탕기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연아는 전기라는 것을 이용해 물을 끓이는 것이 낯설었다. 아, 어차피 여기는 전기뿐만 아니라 모든 게 낯설었다. 쪼그려 앉아 약재를 다 넣고, 사용방법을 익혀 약탕기를 조작한 뒤에 일어나 서서 불편한 청바지를 이리저리 늘려보려던 연아에게 윤숙이 다가왔다. 앞으로 연아가 사용할 방을 안내해 주려는 것이었다.
호운가 사람들은 연아가 정말 산에서만 살아왔든, 그냥 뭔가를 노리고 와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든, 재경이만 낫게 해 주면 되었기 때문에,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귀히 여기라는 대왕신의 말도 있었고, 무엇보다 윤숙은 이렇게 순한 동물같이 어여쁜 연아가 사기꾼일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긴 것만으로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말이다.
‘사업가의 촉이랄까.’
윤숙이 연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여기가 연아양이 사용할 방이에요.”
“저는 그냥 부엌에서 자도 돼요.”
연아의 대답에 윤숙이 기겁했다.
“말도 안 돼요. 연아양은 우리 안씨가문의 손님인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김여사한테 얘기하면 돼요. 알겠지요?”
“네…….”
마치 마을 아줌마처럼 친절한 윤숙의 태도에 연아가 긴장했던 마음을 좀 풀었다.
***
“으, 이거 진짜 써!”
“여기 사탕 있어요.”
연아가 김여사에게 부탁해 준비해 뒀던 사탕을 재경에게 건넸다.
“……고마워.”
밤새 달인 약을 한 모금 마시고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재경은 어제 뱉은 말 때문에 쓰다고 안 먹을 수도 없어서 억지로 다 마시고는 얼른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약 먹다가 너무 써서 죽을 거 같은데. 쓰고 매워.”
“안 죽어요. 3일 치 달여뒀으니까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중탕해서 먹어야 해요.”
“3일이나?”
재경이 놀란 눈을 했다. 평소에는 순한 토끼 같은 연아의 눈빛은 지금, 단호한 의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연아가 태연하게 답했다.
“네, 3일 후에 맥 다시 짚어보고 그 후에 다시 약을 지을 거예요.”
“3일 후에 또?”
“네. 재경씨 몸이 워낙 약해서, 이 약 먹고 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알겠어.”
연아가 다시 순한 얼굴로 돌아가서 배시시 웃으며 재경에게 말했다.
“저는 재경씨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낫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역시, 너 뭔가 노리고 온 거지?”
“그건 좀 서운하네요. 그야, 아프면 힘들잖아요? 재경씨네가 부자인 건 알겠지만 제가 뭘 노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정도로 허술한가요?”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에, 재경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굿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는 예쁜 외모와 순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무당과 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훈에게 발견된 타이밍이 교묘했으니까. 심지어 약초를 들고 왔다니. 너무나 공교로웠다.
‘그런데 엄마는 철석같이 이 어린 여자를 믿고 있단 말야. 오빠도 요 예쁘장한 얼굴을 보더니 경계를 늦춘 것 같고.’
자기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저 말간 다갈색 눈동자를 보면 정말 순진한 애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이다.
연아가 나가고 나서도 재경은 혼자서 끙끙 앓다가 어느 순간 몸이 따뜻하게 풀리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문 앞에서 재경의 기척을 살피던 연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이 그런 연아를 보고 물었다.
“괜찮아요? 제 동생이지만 재경이 성격 장난 아니죠?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커가지고.”
“아니에요. 솔직해서 좋은걸요.”
“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재경이 말고 처음 봤어요.”
“그런가요? 헤헤. 원래 동물이건 사람이건 아프면 날이 서게 되어있잖아요. 재경씨는 귀여운 축에 속해요. 약도 잘 드시고.”
지훈이 피식 웃었다.
“자기도 아픈 건 싫어서 약은 잘 먹더라고요.”
“네.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가족들이 지켜주니 든든하겠어요.”
“연아씨 가족은요?”
연아가 콧잔등을 찡긋하더니 웃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는 제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지훈이 당황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럼 친척들하고 지냈겠네요?”
“아뇨. 혼자 살았어요. 마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죠.”
지훈이 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어우, 정말 미안해요. 그럼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산 거예요? 학교는요?”
“학교?”
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산에서만 살았다지만 학교를 모른다는 눈치에 지훈은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의학 공부는 어디서 했어요?”
“아, 공부는 집에서, 아버지 책 보고 했어요.”
“허어…….”
지금, 제대로 공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한테 재경이를 맡겼단 말인데, 뭔가 잘못됐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이 여자를 믿기로 했고, 아버지의 허락 아래 재경이는 연아가 지은 약을 먹어 버렸으니.
“뭐가 잘못됐나요?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요?”
연아가 지훈의 굳은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조금 망설였다. 멋대로 믿어 놓고 이제 와서 연아를 탓할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학교 문제는 부모님과 상의해서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학교가, 큰 문제가 되나 보네요. 죄송해요. 제가,”
“아뇨, 아닙니다.”
지훈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엇보다, 당황한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연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제가 지어드린 약은 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에 재경씨 몸상태가 더 나빠지거나 하면 저를 관아에 고발하셔도 돼요.”
지훈으로서는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관아라니, 이 무슨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표현인가. 지훈은 문득 연아의 처음 차림새가 떠올랐다. 사극에서 보던, 평민의 복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도와줘서, 혼자서, 산에서, 살아왔다니. 설마, 타임슬립?
‘에이, 설마.’
머릿속에 떠오른 어이없는 상상을 털어낸 지훈은, 연아를 믿는다며, 앞으로도 재경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연아를 방으로 들어가 쉬게 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삐그덕거렸기에 연아는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혼자 남겨진 연아는 뭐가 잘못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학교라는 것에서 걸렸다.
‘공부를 하는 곳인 것 같은데. 서당 같은 개념인가? 서당을 다니지 않으면 큰일이 나던가?’
마을에 서당이 없기도 했고, 연아는 아버지가 글을 알았기에 딱히 서당에 다니지 않았지만 마을에서는 툭하면 연아에게 찾아와 어디가 아프다고 하소연하고 약을 받아가곤 했다. 옆마을 의원의 약보다 연아의 약이 훨씬 잘 듣는다며. 사실 재경의 증세도 낫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한 아이들 보약 한두 번 지어봤던가. 낫기만 하면, 그럼 문제 될 것 없지 않을까?
“아.”
지훈은 ‘의학 공부’라고 했다. 혹시 이 세계에서는 ‘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하지 않고서 ‘약’을 지어주면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큰일이네.”
연아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
망한 걸까. 이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 세상이 연아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마을 사람들에게도, 옆 마을 의원에게도 찾아갈 수 없었다. 팔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갖고 있던 약초도 몇 개는 써버렸고.
‘어떻게든 나무아래가 올 때까진 이 산 주변에서 버텨야 하는데.’
연아는 여름마다 자신에게 찾아오던 혼약자를 떠올렸다. 왼손 약지에 낀 옥가락지를 꼭 쥐어보았다. 그가 잡아주는 것처럼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지금은 봄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가 올 것이다. 오겠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나무아래였으니까. 원래 세상에서 연아가 없어진 걸 알면 찾으러 오겠지. 잠시만 기다리면 오겠지.
“그러니까, 나무아래야. 여기가 어떤 세상이든지, 나를 꼭 찾아와야 해.”
연아가 혼잣말을 했다. 이 산에서 나무아래를 만날 그때까지는 의원으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이 세상의 법도에 최대한 따라야겠지.
똑똑!
“연아양. 나 지훈이 엄마예요.”
“뭔지 몰라도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 쫓아내지는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