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제노는 자꾸 킁킁대며 연아에게 치근덕거렸다. 연아에게 묻어있는 신의 기운이 좋은 냄새를 풍긴 모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덕분에 연아보다 앞서 걷던 지훈은 영문도 모른 채 목줄에 끌려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산비탈에서 몇 번을 되돌아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안 그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데려가는 중이라 찝찝했는데 말이다. 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노. 너 자꾸 그러면 간식 없다.”
제노의 꼬리가 축 쳐졌다. 그 후로는 정상적인 걸음으로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연아는 그제서야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저 사내의 옷차림은 굉장히 낯설었다.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산 아래 저만치 보이는 집도 말로만 들었던 대궐 같았다.
‘저걸 한 계절 사이에 뚝딱 지었다고?’
불이 난 것이 겨울이었고, 자신은 잠깐 자다 깼을 뿐인데, 지금은 봄이고, 주변은 낯선 것 투성이가 되었다.
‘이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어. 언젠가 널 그곳에 데려가고 싶어.’
지금 나무아래의 말이 떠오는 것은 우연일까. 마치 정말,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나무아래와 함께여야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연아는 대궐 같은 집이 가까워질수록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점점 불안해져 갔다.
“연아씨?”
어느새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었나 보다. 제노와 지훈이 앞에서 멈춘 채 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다며 웃는 연아는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지훈은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길 바랐다. 정말, 무당이 말한 대로, 어머니가 믿는 대로 재경이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기를.
“어서 와요.”
문 앞에는 윤숙이 마중 나와 있었다. 윤숙은 예상치 못한 재투성이 아가씨의 등장에 살짝 놀랐으나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온화하게 웃었다.
“난 지훈이 엄마예요. 아가씨 이름은 뭔가요?”
“저는 송연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그래요. 반가워요, 연아양.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 나눠요.”
윤숙이 비서를 쳐다보고는 가보라며 고갯짓을 하니 비서가 눈인사를 하고 급히 떠났다. 연아는 그러나 저러나 대궐 같은 집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눈치껏 고무신을 곱게 벗어 두고 맨발로 집에 들어서니 그제야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닐 것임을 연아가 깨달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고 머뭇거리니 윤숙이 빙긋 웃더니 말했다.
“혹시 씻고 싶으면 씻어도 돼요. 연아양 집처럼 편히 생각해 주면 좋겠네요.”
“그럼 염치불고하고 실례할게요. 좀 씻어야 할 것 같아요.”
“어머, 말 예쁘게 하는 것 좀 봐. 김여사. 안내 부탁해요.”
“네, 사모님.”
욕실로 안내받은 연아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죄송한데.”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말을 걸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사도우미 김여사가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제가 여태 산에서만 살아서 이런 목욕간은 써본 적이 없어요…….”
말끝을 흐리는 연아를 보고 김여사는 왠지 모를 측은함이 느껴졌다. 산에서만 살았다니, 무슨 ‘우린 자연인이다’라도 찍으며 살았나 싶다. 어차피 귀하게 모시랬으니, 목욕시중쯤이야 한 번쯤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김여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씻는 것까지 도와주려던 김여사를 극구 마다하며 내보낸 연아가 혼자서 씻는 동안, 김여사가 윤숙에게 다가가 귀띔했다.
“사모님, 그 아가씨 여태 산에서만 살았다고 합니다. 수도꼭지 사용법도 몰랐어요. 좀 불쌍하더라고요.”
“그래요? 알았어요. 적응할 때까지 김여사가 많이 챙겨줘요.”
“네, 사모님.”
김여사는 연아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려 했다. 연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새 옷을 사기엔 시간이 없었다. 마침 재경도 마른 체형이었고, 연아도 꽤나 말랐기 때문에 재경의 옷을 좀 챙겨두면 되겠다 싶어서 재경에게 허락을 구하러 갔다.
“아! 왜 내 옷을 주냐고!”
문제는 재경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오냐오냐 자란 호운가의 공주였던 재경은, 누구인지,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자기 옷을 준다는 게 마뜩잖았던 것이다. 그래서 허락받으려 말을 꺼낸 김여사에게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그러자 곧 윤숙이 재경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 왜 소릴 지르고 그래. 손님 오셨는데.”
“엄마! 아까 보니까 그냥 거지던데 무슨 손님이야!”
아까 들어올 때 먼발치에서 연아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스읍!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아픈 거 낫게 해 줄 수도 있어. 대왕신이 귀하게 대하라고 그랬잖아.”
“굿한 거 쪽팔려서 어디다 말도 못 해! 근데 그 무당말을 믿으라고?”
“그때 그 무당 신들려서 눈 돌아간 거 너도 봤잖아. 대왕신이 다녀갔다는 말 엄마는 믿어. 진짜 거지라 해도 어떻게 딱 굿을 하고 나서 나타났겠어.”
윤숙이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 연아라는 아이, 정확한 나이는 아직 몰라도 네 또래 같은데, 여태 산에서만 살았다더라. 불쌍해서라도 우리가 잘해주자. 옷 그까짓 거 엄마가 또 사주면 되지. 응? 알았지?”
“……알았어. 근데 옷은 진짜. 어휴, 안 입는 것만 줄 거야. 아, 짜증 나.”
“아이고 내 딸 착하다. 그래그래.”
윤숙이 재경의 등을 토닥이자, 재경은 못 이기는 척 옷장으로 다가가 옷가지 몇 벌을 골라 김여사에게 건네주었다. 주로 맨투맨과 청바지였다.
씻고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연아를 본 호운가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연아가 꽤나 예뻤기 때문이다. 뽀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이 꼭 무해한 생물 같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이다, 딱 붙는 바지가 어색한 듯 내려다보는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다갈색의 생머리가 사르르 흐트러져 내렸다.
“어머나, 연아양 너무 예쁘네요. 아까는 먼지 때문에 이 미모를 못 알아봤네.”
윤숙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지훈은 지금, 아까 자신이 데려온 사람을 보고 있는 게 맞는지, 그러니까 같은 사람인 건지 눈을 비비고 싶은 것을 참느라 혼났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재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쯧. 팔짱을 끼고는 아니꼽게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연아라고? 몇 살이야?”
“아, 스무 살이에요.”
“억지로 반갑다느니, 어떻다느니 하지는 않을게.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네. 집에 잠시 머물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에요. 폐 끼치지 않도록 금방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윤숙이 물었다.
“우리 재경이보다 어린데, 어디 갈 곳은 있어요?”
“그게…….”
원래의 세상이라면 보따리에 가득한 약초만 팔아도 어디 외진 곳에 집 한 채 마련해서 살 수 있었는데, 여긴 시세가 어떨지 모르니 연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갈 곳이 마련될 때까지 여기서 머물러도 괜찮아요.”
연아의 난처함을 읽은 윤숙이 말했다. 지훈은 옆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재경이 누구 맘대로 여기서 계속 머물게 하냐고 따지려다가 윤숙의 눈빛을 받고서 참았다. 이 별장은 호운가의 것이지만 몸이 약한 재경이 살다시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제 공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재경이 연아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었다.
“아. 나 피곤해. 쉴 거야.”
못마땅한 재경이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윤숙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해해 줘요. 우리 재경이, 애가 나쁜 애는 아닌데, 몸이 아파서 성격이 좀 까칠해요.”
“저, 재경씨는 몸이 많이 아픈가요?”
연아가 물었다. 연아는 원래 마을에서 약초꾼 겸 의원의 딸로 자라 어릴 때부터 아픈 이들을 많이 돌봐왔었다. 연아가 보기에도 재경의 몸은 약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약했는데, 커서도 툭하면 쓰러지고 그러네요.”
윤숙은 혹시 연아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다. 유명하다는 의사들한테 재경을 보여봤지만 선천적으로 약하다는 말만 하고 딱히 해결 방법이 없어서 얼마 전에 굿까지 한 것 아닌가. 그 굿판에서 무려 대왕신이 내려와 귀히 여기라고 했는데 말이다. 윤숙은 귀히 여기라는 그 대상이 당연히 연아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제가 맥을 한번 짚어봐도 될까요?”
“맥? 한의원에서 하는 그거? 혹시 의학 공부를 했나요?”
윤숙이 거의 튀어나올 듯이 뛰는 심장께를 눌렀다. 재경이 쓰러지지만 않게 된다면야 뭐든 할 수 있었다. 딸을 낫게 해 준다면 자신이 관리하는 그룹 계열사를 넘겨줘도 상관없었다.
“예. 이곳 의학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요.”
윤숙과 지훈은 그 말을 양의학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윤숙은 연아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우리 재경이 낫게만 해준다면, 원하는 거 뭐든 들어줄 수 있어요. 맥을 짚으면 아픈 원인을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봐야 알 거 같아요. 다른 의원님들이 어려워하신 거라면 저라고 별 수 있을지…….”
“아니야, 아니에요. 우리 재경이 툭하면 쓰러지지만 않으면 돼.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볼까요?’
연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똑똑!
“들어와.”
“네. 실례할게요.”
연아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던 재경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네가 왜 들어와?”
“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랬지만.’
재경이 할 말을 잃고 헛기침을 했다.
“크음, 너일 줄 몰랐지.”
“죄송해요. 잠깐 맥만 짚어보고 나갈게요. 팔 좀 주시겠어요?”
“맥? 한의원에서 하는 그거?”
“음.”
사실 연아는 한의원이라는 게 따로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아까도 들은 말이기에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재경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네가 의사야?”
“손목만 가볍게 잡을 거예요. 해치지 않아요. 걱정할 거 없어요.”
연아가 재경을 안심시켰다.
“제가 의원이 아니라도 재경씨는 손해 볼 거 없잖아요? 팔만 주면 되는 거예요.”
“이익.”
연아가 저렇게 세상 무해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하니 날이 서있는 자신이 더 못된 것 같아 더 말하기를 그만둔 재경이 픽 돌아누워 왼팔을 내밀었다.
“뭐, 보던가, 말던가.”
빙긋 웃은 연아가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은 뒤 조심스레 재경의 손목을 잡았다.
얕게 흐르는 맥동이 선천지기가 약함을 알려주었다. 혈압이 낮고, 몸에 찬기운이 강해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이 어지럼증이 온 원인이었다. 픽픽 쓰러진다는 것도 이해가 됐다. 장기들이 각자 얼음 하나씩 매달고 있는 것같이 차갑게 굳은 게 느껴졌다. 연아는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약초를 가늠해 보았다. 다행히 이런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많이 춥지 않았어요? 그런데 식은땀은 자주 나고. 툭하면 어지럽고. 힘들었겠다.”
연아의 다정한 말에 까칠한 재경도 놀라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