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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Sep 05.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05

05.

 “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쫓아내다니?”


 윤숙이 놀라 되물었다. 그저 밥 먹고 옷 사러 가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연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제가, 흐읍,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흐읍, 죄송해요.”


 “아, 학교. 방금 지훈이한테 대강 전해 들었어요. 상황이 어려웠다죠? 학교 문제는 우리가 도와줄게요. 검정고시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울지 말아요, 응?”


 “저한테 다들, 흐읍, 왜 이렇게 친절하셔요?”


 “그야, 대왕신이, 아니, 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연아양은 우리에게 귀한 사람이라고.”


 연아가 눈물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전 아직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는걸요?”


 “괜찮아요. 설령 재경이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난 연아양을 딸처럼 여길 생각이야. 아기 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자구요.”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윤숙이 연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제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밥 먹고 가까운 데 가서 가벼운 옷 몇 벌 사고 와요. 재경이 옷이 연아양한테는 조금 기네. 호호.”


 안 그래도 소매와 청바지 끝단을 접어 올려서 입고 있던 연아였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윤숙의 농담이 먹혔는지 연아도 멋쩍게 웃었다.


 “그치만 밥 먹은 후에는 재경씨 약 챙겨줘야 해요.”


 “그건 김여사가 하면 되지요.”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재경씨 몸이 워낙 약해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래서요.”


 “음, 실례일리가 있나요. 연아양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요. 나야 고맙지.”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아를 다독이며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윤숙이었다. 비서를 시켜 알아보니 이 송연아라는 사람은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건데, 요즘 세상에 그게 말이 되나. 그렇다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치고는 약초며, 의학이며 잘 아는 모양새인데. 아예 타고난 사기꾼이라면 모를까 너무 어리고, 순진해 보였다.


 ‘내 눈을 믿자.’


 말하는 거며, 밥 먹는 모습 하며, 조신하니 왜 이렇게 고운지. 윤숙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연아를 자신의 딸 삼고 싶을 정도였다.


 “연아양, 혹시 공부하는 거 좋아해요?”


 “공부요? 책 읽는 건 좋아해요.”


 “그럼 됐어요. 서류 처리는 우리 쪽에서 해줄 테니 지금이라도 의학 공부를 제대로 해 보는 건 어떤가요?”


 “어머니?”


 지훈이 놀라 윤숙을 불렀다.


 “왜. 이왕이면, 대학도 나오고 자격증도 따고 그럼 좋지.”


 뭔지 몰라도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연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다 이내 풀이 죽었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바랄 수는 없어요. 아버지께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은 항상 대가가 따른다 하셨지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연아의 말에 윤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경이의 상태가 호전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아…….”


 “이제 와서 자신 없다고 하면 안 돼요. 우린 연아양을 믿고 있으니까.”


 연아가 다시 의지를 다졌다.


 “네. 괜찮으시다면 저는 재경씨 약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윤숙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연아가 일어나서 부엌으로 간 후에, 지훈이 조용히 윤숙에게 물었다.


 “정말 믿으세요?”


 “그러니까 재경이를 맡겼지. 왜? 너는 연아양을 못 믿겠니?”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항상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셨잖아요.”


 윤숙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업가의 촉이란 것은 무시 못한다고도 했지. 조심히 지켜보자꾸나.”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재경씨. 약 먹을 시간이에요.”


 연아가 약을 들고 재경의 방으로 들어섰다.


 “왜 네가 가져와?”


 “그야, 제가 맡은 환자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까요.”


 “너 꼭 의사처럼 말한다.”


 재경이 코웃음 쳤다. 그러면서도 약 그릇을 받아 들었다. 재경도 말은 저렇게 하면서 연아를 믿어주는 것이다. 연아가 살포시 웃었다. 이래 보여도 약초꾼 경력 열다섯 해이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서책도 다 외웠다.


 ‘내가 당신을 꼭 낫게 해 줄 거예요.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아! 써! 사탕 줘! 사탕!”


 재경이 먹은 쓰디쓴 약의 효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다음날, 재경의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몸에 찬기운이 서려 잠을 깊게 못 자던 재경이 이틀 연속으로 꿀잠을 자고 일어났으니, 날이 서 있던 말투가 한참 누그러졌다. 그녀가 연아에게 물었다.


 “너, 나한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저는 그저 재경씨의 체질을 개선해 주는 처방을 했을 뿐이에요. 아무런 술수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 농담이야, 농담.”


 재경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 나 진짜 개운해! 밖에 놀러 나가도 될 것 같다니까?”


 “아이구, 내 딸. 아유, 잘됐다. 다행이야.”


 윤숙이 눈물을 글썽였다. 딸의 밝은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인지. 밖에서 쓰러질까 봐 나가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했던 아이가 나가 놀고 싶어 하다니. 한창 꾸미는 거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노는 걸 좋아할 나이에 집에만 있는 재경이 안쓰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대로만, 조금씩이라도 나아만 준다면!’


 그럼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맥을 다시 짚어볼게요.”


 연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재경의 옆으로 갔다. 이번에는 군말 없이 손목을 내미는 재경이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세심하게 맥을 짚었다. 이유는 지난번엔 큰 맥만 짚어봐도 상태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몸에 열기가 돌았다. 체온이 높다는 게 아니라, 굳어있던 장기들이 조금씩 풀린다는 뜻이었다. 연아의 약 처방은, 틀리지 않았다.


 연아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면서 피가 잘 돌게 되면 어지럼증이 많이 완화될 거예요.”


 호운가 사람들은 이제 연아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 까칠했던 재경까지도 연아를 보는 눈빛이 풀어졌다. 조용히 일어나 서랍을 뒤적이더니 진주 머리핀을 연아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한 번도 안 쓴 거야. 진주 갖고 싶어서 샀는데 나하고는 안 어울려서. 너 써.”


 연아가 어리둥절하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진주? 이거 엄청나게 귀한 거 같은데, 받아도 되려나하고 윤숙을 쳐다보니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숙이나 재경의 입장에서 진주 머리핀쯤 연아에게 주는 거야 별 일 아닌 것이다. 내친김에 윤숙이 연아의 귀 옆으로 머리핀을 꽂아주었다.


 “피부가 뽀얘서 잘 어울린다, 얘.”


 선물을 받으니, 윤숙의 말 뒤로 옛 기억이 겹친다.


 ‘아, 난 손이 보드랍지 않아서 가락지가 어울리지 않을 텐데.’


 자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을 잡아 가락지를 끼워주던 그녀의 혼약자.


 ‘잘 어울려.’


 낮은 웃음을 웃으며 그가 말했었지. 연아가 그리움에 고개를 숙였다.



***



 남자의 주변은 온통 암흑이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굴려 빛을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사지가 사슬에 묶인 듯,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박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수록 더욱더 강하게 옥죄어왔다. 팔과 다리를 옭아 맨 그것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은 계속해서 남자의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끝없이 되뇌었다. 가야 한다고. 가야 한다고. 더 늦어버리기 전에.


 ‘늦어? 무엇에?’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남자는 몸부림을 멈추었다. 가만히 멈춘 몸은 암흑에 서서히 잠식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다. 가라앉은 기억처럼, 몸도 심연의 늪에 가라앉았다. 암흑은 그를 감싼다. 이대로 가라앉으면 편할 거라는 듯이. 그 달콤한 유혹에,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꿈, 이군.”


 왼팔을 들어 본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손등을 비추면, 왼손 약지의 흉터가 도드라져 보인다. 남자는 모른다. 언제 이렇게 다친 건지, 기억이 없다. 사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지만 이제와서는 사는데 문제 되지는 않았다.


 “난. ‘연’이다.”


 연은 팔을 내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 흉터를 들여다본다. 이것은 아마도 과거의 문을 여는 힌트일 것이다. 왼손 약지를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이렇게 다친 이유를 알게 된다면, 과거의 한 자락을 낚아채는 것이라고.


 그는 매일밤 되풀이 되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심장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과거, 옛날의 자신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냈다. 세계를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며, 돈을 모았다.


 그랬더니 어느새 세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의 오너가 되어 있었다.


 늙지 않는 몸 때문에 일정기간 세상으로부터 숨어있어야 하지만 그거야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온 지 어언 5백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쌓인 노하우가 있었다. 머물고 싶은 나라에 펜트하우스를 하나 사놓고 일은 비서들을 시키면서 적당히 한량처럼 지내면 되는 것이다.


 연은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동하게 되면 자주 머물게 되는 곳이었다. 이것도 과거의 영향인가. 연이 고민을 털어내듯 머리를 털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



 재경은 며칠째 컨디션이 정말 좋았다. 이러다 이전으로 돌아가면 정말 살기 싫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다고 포기했던 것을 연아가 며칠 만에 고쳐놓았으니,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에 재경이 연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연아야. 네가 내 은인이야.”


 “우리 안씨 집안의 은인이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렴.”


 윤숙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에 연아가 수줍게 물었다.


 “저, 그럼 여름까지만, 이 집에서 신세 져도 될까요?”


 연아의 소박한 바람에 윤숙과 재경이 펄쩍 뛰었다.


 “아니, 얘. 어디 갈 데도 없다면서 무슨 ‘여름까지만’이야?”


 “맞아. 어디 갈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나랑 쭉 같이 살자. 나 서울에도 집 있어. 거기도 방 남으니까, 응?”


 이제 재경은 연아가 곁에 없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아예 같이 살았으면 했다. 윤숙의 입장에서 그것은 찬성할 만한 일이었다. 주치의가 같이 사는 셈 아닌가?


 “그렇지만, 여름엔 제 혼약자가 오기로 되어있는걸요.”


 “뭐라고? 혼약자요?”


 이번엔 지훈이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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