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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결코 시시하지 않은 사랑의 여신 '마츠코'

어느날 사체로 발견된 그녀, 마츠코. 영화<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마츠코라는 여인의 삶을 플래시백한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죽은 누이의 삶을 '시시하다'라고 평가했지만 알고 보면 그녀의 삶은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사랑의 여신'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릴적, 아픈 여동생으로 인해 웃음을 잃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로부터 애정결핍을 느끼며 살았던 마츠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코는 동생에 대한 질투를 억누르고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버지의 웃음을 되찾아주었고 그 장난기와 흉측함이 뒤섞인 표정이 습관이 되어 많은 이들로부터 오해와 비판을 받기 일쑤다. 아버지와의 거리에서부터 시작된 마츠코의 삶은 좀처럼 순탄하지 않다. 중학교 교사로 일함으로써 연루된 절도사건과 그로 인한 해고, 함께 동거하던 작가 지망생은 자살했고 심지어 그 자살광경을 목격하기까지 한다. 이후 교제하게 된 남자는 그녀와 불륜관계였으며 결별 후 매춘에 빠지게 된다. 기둥서방에게 배신당한 후 살인을 저질러 징역 8년을 선고받는가 하면, 출소 후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미용사를 찾아갔더니 그는 이미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렇게 남성들로부터 버림받은 마츠코는 교사 시절 절도사건의 범인이었던 제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야쿠자인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 마츠코는 운명이라 여겼던 사랑마저 힘들어지자 자신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나간다.



타인의 관점에서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마츠코의 삶은 아픔의 릴레이나 다름없다. 한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 여성의 꿈일테다. 하지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보여주는 한 여성의 삶은 피비린내와 쓰레기 더미와 뒤엉켜있다. 그것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일 것.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을 받느냐가 삶의 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가 삶과 사랑의 가치라 정의내린다.



마츠코의 삶은 아름다운 꽃으로 채 완성되지 못했겠지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해왔던 그녀는 '주도적인 사랑을 했던 여성'이다.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이라는 선물을 줬으며, 목숨을 걸 만큼의 희생을 정작 본인은 희생 아닌 냥 순수하게 바쳤다. 마츠코 그녀가 생각하는 최상의 가치를 몸소 이행하며 그 누구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니며 살았던 여인. 그런 그녀의 '알고 보면 가장 위대했던 삶'을 다룬 영화가 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다.


어쩌면 영화가 다뤄낸 마츠코의 삶은 잔인하고 잔인하다. 단순한 생채기라고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많은 감상자들이 '그녀의 삶이 결코 내게는 닥치지 않았으면…' 하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오른 천국의 문은 '사랑의 여신'만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으리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그랬으리라. 물론, 그녀는 인간미를 지닌 여성이다. 아버지에게, 애인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여성이었으며 자기주도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려했던 여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바가 클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살아왔던, 살아가려는 여성들에겐 따끔한 충고를 주는 영화이며, 사랑의 정의를 재정립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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