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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안아주고 싶다, 조제…

이 영화는 언제 봐도 먹먹하다. 그 먹먹함은 좀처럼 단련되지 않는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때는 2005년 여름. 홀로 DVD방에 들러, 주인 아저씨에게 영화 세 편만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통해 감상하게 된 것이 첫 만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영화를 감상하던 모습과 조제가 자기의 방에서 움츠린 채 책을 읽는 모습과 엇비슷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것과의 만나고 그것에 푹 빠져있는 모습…. 당시 스무살이었던 나는,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조제에게 이별을 통보한 츠네오에게 분노 감정만 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로 맨스영하는 로맨틱하며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소녀감성에 사로잡혀있던 때였으니까.



사실, 이 영화와는 감상을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접촉해왔었다. 수업시간에서도, 책에서도 수없이 만나왔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를 너머, 사회성, 개인의 자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니까 학습자료로 쓰여지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이 영화에 내성을 다져왔었다.


최근에 다시 감상하게 된 영화는 첫 만남 이후 꽤 긴 시간동안 많은 일들을 겪어 온 나에게 '화해'의 손짓을 건넸다. 조제, 그녀의 삶 일부를 다룬 이 영화는 나의 과거 속 어느 시점으로의 회상에 잠기게 만듦으로써 '너도 이런 때가 있었지? 츠네오의 심정, 어느 정도 이해하지? 그리고 이게 현실이라는 것도 잘 알지?' 라며 영화와의 동맹을 유도한다.


정말, 그랬다.

나도 조제처럼 무언가에 푹 빠져있을 때가 있었고, 그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다. 조제를 세상 밖으로, 온갖 어두운 편견들로부터 그녀를 꺼내어 준 츠네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다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조제와 같이 신체적 결함을 안고 있는 건 아니지만, 몰랐던 것(혹은 세계)에 대해서는 나도 그녀와 같이 비적응자와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알아가는 것들이 많아지는 동안, 결국 이별이란 것과 만나게 됐다(물론, 이별의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준 사람과의 이별은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나고보면, 모든 이별은 이유나 시기가 마땅하니까.



조제의 사랑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던 스무살 때의 감상과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저들의 이별을 극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영화를 곧이곧대로 봤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이 영화에 대하는 데 있어서 더이상 조제는 장애를 지닌 나약한 여성이 아니다. 그저 한 명의 여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진심어린 사랑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 드는 생각은, 조제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을 뿐이라는 것. 장애나 편견에 뒤덮인 여성에 대한 처량한 시선이 아닌, 그저 이별한 타인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 장애라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그들은 충분히 헤어질 만한 이유가 있었을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영화를 볼 때, 조제의 장애와 주변의 환경을 배제한다. 오로지, 남과 여. 그들을 본다. 환경 때문에 많은 변수들이 생기는 건 영화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러하지만, 환경적 요인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사랑과 이별을 수없이 겪는다. 그리고 또다시 외로워지고 극복하기 위해 또다른 사랑을 찾는 등의 방법을 모색한다.


사랑이 끝났다. 아픔의 연속이다. 이 아픔,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본인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조제를 보며 힘 내길 바란다. 당신과 조제는, 서로가 위로의 대상이 되어줄 테니까. 어쩌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치유의 영화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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