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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다른 방식으로 보기>

아카데믹 예술감상에서 자유로워지기

우리의 삶은 예술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수많은 작품들 속에 둘러싸인 우리들. 하지만, 개인은 모두 같은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볼 것들을 선택하고, 선택한 작품에 대한 개인의 판단들 또한 각양각색이다. 이렇듯, 우리는 시선과 관념에 있어 '자유'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많은 예술비평 서적들은 원칙들을 끌어들여 감상의 자유를 제한한다. 온갖 현학성으로 독자들의 자유로운 예술감상을 복잡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것은, 독자들은 비평 서적이 '강요'하는 감상법들과 이견(異見)을 갖는 순간 자신의 감상이 '틀렸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감상에는 정답이 없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그 책들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형식 또한 규정이 짜여진 듯 비슷하다. 다뤄지는 소재는 예술작품들이며, 생성되는 콘텐츠는 줄곧 작품 안에 갇혀있다. 쉽게 말해, 유명화가의 그림을 제시한 후 기법이나 메시지 등을 분석·설명하거나 화가의 삶을 조명한다. 대부분의 예술에 관한 책들은 이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여느 예술서적들이 다뤘던 아카데믹한 감상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저자 존 버거는 일반적인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이 있다'는 식의 책들에 반대한다. 여느 책들에서 제시된 작품들은 명백히 저자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것에 대한 분석 또한 상당 부분은 '사적(私的)'이다. 독자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책들을 대해야만 한다.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순간, 수동적인 예술감상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이 책은 다소 폭력적이라는 평도 받아왔다.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 습득이 가능하며 적극적인 흥미를 유도한다. 아카데믹한 예술 감상에 반기를 든 저자는, 사회와 정치체제, 문화와 철학 등 작품 밖의 요소들을 끌어들인다. 가령, 유화 작품을 설명할 때엔 그것이 어떤 이의 요구로 그려지게 됐는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유화 고유의 특성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것이 현대 이미지인 광고와 어떻게 연속되는가 등을 진단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구성 또한 흥미롭다. 각 장은, '이미지', '본다' 등의 용어들에 대한 저자의 사유에서부터 다양한 매체의 사회·문화적 기능들을 다루는데, 어떠한 장은 일련의 같은 주제를 담은 예술작품들로만(텍스트 없이)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꽤나 불친절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저자는 편협한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감상의 자유를 선사한다. 각 장은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으며, 아카데믹한 감상 방식과 다르게 작품들을 감상한다 해도 좋다.


'본다'는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활동이다. 거기에는 감상자의 '선택'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감상자의 생물·철학적 선택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상황과 매체들의 목적에 의한 '다른 요소'들로 설명된 이 책은 독자들의 자유를 존중해준다. 물론, 이 책 또한 저자의 관점이 배어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 개인이 전문가들의 감상법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미술서적들과 달리, 미술작품의 가치를 액자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고, 그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이 책은 미술 감상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 외 모든 타자들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일침을 가한다.




[책속 밑줄 긋기]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 p. 9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 p. 101


진부한 작품은 서투름이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p. 103


대개 광고를 스쳐 지나가거나 넘겨다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걷거나 여행하거나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광고를 스친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론상으로는 우리 자신이 행위자다. 즉 우리는 화면으로부터 눈을 돌려 버리거나, 볼륨을 낮추거나 또는 커피를 마시거나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광고를 스치는 게 아니라, 광고가 끊임없이 우리를 스치고 있다는 인상을 갖는다. - p. 151


광고란 결코 쾌락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항상 구매자들에게, 그들이 팔고자 하는 상품이나 기회에 의해 자신이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 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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