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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우리를 둘러싼 헛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작품


오랜만에 등장한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수상은 놓쳤지만,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과 벌칸상을 거머쥔 이 작품. 어찌됐든 이 영화는 다양한 소재와 생각거리로 어우러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임은 틀림없다.


사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단어로부터 시작해야할지 정리가 잘 안 된다. 모든 것들이 허상같기 때문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긴 시간동안 봐온 결과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도 의심이 갔다. <버닝>이라는 영화 자체가 한 순간에 불타 사라져버린 허상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의 허와 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손에 잡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의 실존 여부를 재단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들.

자, 어찌됐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한 만큼, 나만의 해석을 찬찬히 풀어나가보겠다. 나는 영화의 제목인 '버닝'의 의미를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봤다. 먼저, 주인공 종수의 해미를 향한 불타는 사랑이다. 아르바이트 중이던 종수는 어릴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 해미와 조우한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서글픈 청춘이다. 해미의 상황 역시, 종수와 다르지 않다. 나레이터 모델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이렇다할 꿈은 없다. 특이점은, 재미로 판토마임을 배우고 있다는 것 뿐이다. 이렇게 만난 둘은 급진적으로 가까워지고, 종수는 해미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둘의 술자리에서 귤을 까 먹는 판토마임을 보여주던 해미는 종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거야."라고. 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레이트 헝거'를 찾기 위하여. 여기에서 말하는 그레이트 헝거는, 배 고픈 자가 아닌, 삶의 의미를 쫓는 자를 일컫는다. 즉,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것이다. 그러면서 종수에게 자신이 키우는 '보일'이라는 고양이가 있으니, 여행 중에 밥을 챙겨주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종수는 보일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다. 어찌됐든 종수는, 해미에게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그녀와 보냈던 시간을 곱씹고 추억한다. 하루에 딱 한 번 빛이 드는 해미의 방에서 종수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의 빛은, 종수에게 사랑의 불씨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해미는 벤이라는 남자와 귀국한다. 벤의 상황은 종수와 해미와는 정반대라 볼 수 있다. 젊은 나이에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미스터리한 인물, 벤. 나이나 직업 같은 것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뭔가 희한한 생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태우다'라는 두 번째 의미가 등장한다. 사실, 제목의 가장 직접적인 뜻인 '태움'은, 영화에서 직·간접적으로 수차례 등장한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종수는 과거에 비닐하우스와 옷을 태운 기억이 있다. 해미는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한다. 태양이 작열한 후 사그라드는 것처럼, 무언가를 태우는 것 역시 한 순간의 연기처럼 존재를 사라지게 만든다. 이 시점에서 해미의 대사가 떠오른다.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 없는 것을 잊는다는 것의 의미는 곱씹어봐도 복잡하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면 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버닝> 속 모든 인물들과 사건(그리고 오브제들)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되는 것이다. 과연, 종수가 사랑했던 해미라는 인물이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벤의 은유 섞인 잔인한 사건들이 일어나긴 한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일 수도 있겠다, 라는 허무한 생각마저 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가 아닌, 연기같은 이미지들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해 본 버닝의 의미는, 현 청춘들의 삶과 연계지어봤다. 요즘의 청춘은 열정을 쏟아도 그것이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허무 속을 걸어가는 듯하다. 영화는 '번아웃 증후군' 같은 것에 시달리는 청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대학까지 나왔지만, 자신의 꿈에 가닿지 못하는 종수,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삶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벤, 친구와 가족, 돈 모두가 소진된 상태인 해미. 이 셋의 상황은 각기 다른 형태의 '번아웃'을 보여준다. 씁쓸하고 안타깝기에, 무언가 자극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헤매는 청춘들이다. 그렇기에 청춘들은, 종수의 불안과 분노에 어느 정도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버닝>을 보는 내내 곱씹었던 소재는 '허와 실'이다. 단순히 영화라는 매체만 봐도 그렇다. 꽤 긴 시간을 숨죽여 집중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의해 창조된, 완전히 실존하지 않는 것이 영화다. 종수가 많은 것들을 태운 주 원인 역시, 실존하지 않는 상상과 감정이라는 것들에 기인한다. '버닝'이라는 것은 어찌됐든 일순간적이라는 것에 기초한다. 15분이면 모든 것들이 타 없어지고, 뜨겁게 끓어오르던 사랑과 작열하던 태양도 어느 순간 차갑게 식어간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도 마찬가지다. 삶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뜨겁게 삶을 태우다 차갑게 식어가는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벤이 말했던 것처럼 '태워지기를 바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통해, 도처에 널린 타오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태운들 무엇하리'와 같은 허무주의적 생각도 들었다. 어찌됐건,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같은 영화들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영화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어지는 미스터리의 힘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의 골자를 토대로 확장시킨 이창동 감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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