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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루시!>, 포옹이 간절한 시대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었다


홀로 살아가는 40대 중년 여성 세츠코는 외로움의 대명사다. 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직장에서도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하다.

직장에서 세츠코는, 젊은 여직원들이 나이 든 여직원을 험담한다. 여행에서 사 온 디저트를 선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가지고 트집 잡는다. 세츠코가 입을 다문 것은, 자신 역시 험담의 대상인 여직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모두가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군상은,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끔찍하게' 그려진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플랫폼 위에 선 직장인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세츠코의 가슴을 만진 후 산로로 뛰어든 것. 그의 행위는 그저 스쳐지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설명도, 그래서 그의 행동에 대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영화는 '냉랭하게' 시작됐다.



이런 끔찍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큰 동요 없이 하루를 보내는 세츠코의 모습에서는 무료함과 지친 기색이 짙에 배어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 어떤 즐거움도 찾지 못했던 그녀. 웬만한 충격에도 움찔하지 않는 모습은 왠지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극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조카가 제안한 영어회화 수업 수강이다. 그렇게 기묘한(?) 수업이 시작된다. 미국인 강사 존은, 미국식 수업이라며 수업에서 포옹을 빠뜨리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수업을 듣는 톰과도 포옹을 제안한다. 그런데 세츠코는 그 포옹으로 수업에 흥미를 느낀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었다'



<오 루시!>의 리뷰 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세츠코가 존으로 하여금 '루시'라는 이름을 건네받고 '새로운 감정을 싹틔웠기' 때문이다. 사랑은 물론, 타인의 체온조차 온전히 느껴보지 못했던 세츠코가 포옹으로써 타인의 따듯한 체온을 알게된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느껴왔던 냉대와 이미 그것들을 초월한 세츠코에게 변화를 준 작지만 강렬했던 포옹. 그녀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포옹이라는 행위와 그것이 주는 놀라운 힘을 말이다.


이후, 무미건조한 일상과 내면에 파동을 일으킨 포옹은 세츠코를 변화시킨다. 사랑에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조카를 찾는다는 명목 하에, 존을 찾아 LA로 향한다. 끝내, 포옹 이상의 강렬한 육체적 교감으로까지 이어진다. 한 번 시작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세츠코는 무서울 정도로 존에게 집착하기까지 하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방적인 사랑이 가열되면 집착으로 변하게 되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집착은 상대에게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세츠코가 열정을 발휘한 때가 바로 존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난 이후부터다. 그리고, 그 이후 어찌됐든간에 세츠코의 '주체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사랑이 필요했을 뿐인데, 타인의 체온을 느끼고 따듯한 관계를 알고 싶었을 뿐인데, 세츠코가 살아온 지난 날은 너무나도 냉랭하고 가혹했던 것 같다. 아무리 사랑이 주 소재이고 포옹과 애정 신이 이어져도 영화의 온도가 따듯하지 않다는 것은 쓸씁하기 그지없다. 단지, 타인과 관계 맺고 힘들 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포옹이 필요했을 뿐인데, 세츠코의 과거에는 그것들이 부재했었다.

아픔을 감내하면서까지 사랑을 몸에 새겨넣은 세츠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사랑의 온도와 향을 느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녀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갈망에 의한 일방적인 집착성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을 찾길 응원한다. 이 응원은, 세츠코뿐 아니라, 나와 모든 이들을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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