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노란집>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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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산문집 <노란집>.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노인의 삶을 그려낸 책이어서 그런가 보다. 작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써왔던 글을 엮은 것으로, 단편 소설같은 노부부 삶을 다룬 '그들만의 사랑법'에서부터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 형식의 글까지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이 마음에 든 이유는, 일상의 소소함을 다루지만 그 속에 밴 속 깊은 메시지가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이유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밝힌 작가의 글에서, 노년의 자신을 한껏 사랑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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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노랑의 의미처럼 밝고 따듯하다. 더불어, 소박하고 단아하다. 소재에 따라 써내려간 글들은 길지 않은데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하게 표현돼 있다. 확실히 연륜이 밴 글들이다. 연륜과 멋이 밴 글에는 유머와 위트가 깃들어있기 마련인데, 이 책의 글들이 그랬다. 작가 역시, 촌철살인의 글을 사랑해오다, 노년이 되어 타인에게 위로가 되는 따스한 글을 쓰고 싶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은 노란집 일대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바들이 담겨있어서인지,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과 그것들로부터 배운 것들이 잘 구현돼 있다. <노란집>은 결코, 젊은 세대들에서부터 나올 수 없는 글. 일제 치하, 6.25 전시를 겪지 않은 이들로부터 나올 수 없는 글,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사람만이 적을 수 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는 값진 책들 중 하나다. 나는 이 책으로 하여금, 박완서 작가를 더 존경하게 됐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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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일한 만큼 논밭이 늘어나고, 부지런히 사랑한 만큼 자식새끼들도 늘어나 손발이 북두갈고리가 되도록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것밖에는 딴 삶의 방식을 생각할 겨를이 없던 그들의 한창때,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더러 그들을 딱하게 여긴 일가붙이나 이웃들도 없지 않아 있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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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가다 보면 약수터도 나오고 배트민턴장이나 암자도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길은 볼거리 없는 그냥 산길이다. 그 대신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나무와 풀들, 새들과 다람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은 꽃나무들이 온전하고 온갖 새들이 거침없이 지저귄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칠십 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한 남처럼 여기면서 칠십 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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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복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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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 괴로움을 낳고 마음의 병이 된다는 것은 그 집착하는 바가 비록 새우젓 꽁다리 같은 하찮은 거라 해도 변함없는 진리가 아닐까.
이런 U턴 현상과 함께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이 점점 시들해지다가 이제는 짐스러워서 맨날 장만하기보다는 없앨 궁리부터 하게 된다. 노망이라기보다는 이제야 조금은 지혜로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일용할 소모품 외의 물건 장만을 거의 안 하고 산 지는 이십 년도 넘는다. 안 하는 대신 버리지도 않아서 요번에 오랜만에 이사를 하려고 들춰내니 그 분량이 엄청났다. 내 생전에 다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 또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들, 아름답지도 기능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공간이나 많이 차지하는 옷장들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끼고 살던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안 버린 것도 결코 미덕이 아니었다. 진작 버릴 마음을 가졌더라면 남들이 갖다가 이용할 수도 있었으련만 지금은 아무도 안 거들떠볼 순전한 허접쓰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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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어렵고 발목이나 무릎에도 부담이 더 간다. 가끔 나보다 젊은 사람들하고 산에 갈 적이 있는데 그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오르막길에 기운을 다 써버리면 내려올 때 다리가 휘청거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 힘으로 당당하게 걸어 내려오려면 올라갈 때 힘을 다 써버리지 말고 남겨놓아야 한다. 등산에 있어서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 인기에 있어서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 품위 있기가 더 어렵다는 걸 적진 권력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곰곰이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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