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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풀잎들> 리뷰,
그럼에도 살아가리라

남몰래(?) 기다렸던 홍상수 감독의 스물 두 번째 작품 <풀잎들>을 만나고 왔다. 이전 작품들보다 더 소소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제목처럼 '풀잎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작중 인물들이 모이는 곳은 외진 골목의 한 커피집이다. 많지 않은 테이블에 앉은 남녀 그룹은 각기 다른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어간다. 커피집 손님들 중, 유일하게 홀로 앉아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기록하는 관찰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아름'이다.



커피집에 모인 네 그룹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대강 이렇다. 친구의 죽음을 두고 싸우는 미나와 홍수, 남는 방에 얹혀살고 싶다는 연극인 창수와 이 상황을 거절하며 난처해하는 성화, 한 달 정도 펜션에서 동거하며 공동 집필을 해보자며 지영을 설득하는 경수다. 그리고, 아름이 자신의 동생 커플과 함께 찾은 밥집에서 아름이 엿들은 대화의 주인공들은 죽은 교수의 연인 순영과 그를 다그치는 재명이다.



이들은 밤이 늦도록 커피집을 떠나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긴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기록하는 아름의 역할을 객관적인, 전지적 시점의 인물로 보이지만, 그녀 역시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동생 진호가 그녀의 연인 연주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결혼이냐?"며 닦달한다. 심지어, 밥집에서 나온 후 사랑에 물들어있는 동생에게 화를 낸다.



관객들은 아름의 시점에서, 커피집과 밥집에서 이어지는 남녀 간의 은밀한 대화들을 엿듣게 된다. 그들의 대화가 <풀잎들>을 이어가는 주체가 되는데, 흑백으로 채워진 영화 속에서 그들이 다루는 소재들 역시 평범하지만은 않다. 사랑과 죽음, 일을 비롯한 자신들만의 묵직한 삶의 이야기들이 소재로 등장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사연들과 함께 우리네 삶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제목처럼 사사롭고 소소한 대화들로 어우러진 <풀잎들>.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영화 전반에 드리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역시나 '사랑'이다.



늘, 사랑을 중심에 두고, 돌고 도는 우리네 인생사를 말해왔던 홍상수 감독의 작가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풀잎들>은 '죽음'이라는 테마가 전면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자살한 사람들과 그들과 가장 가까웠던 이들의 회고, 자살을 결심했던 이의 현재는 가슴 저릿함을 전한다.


이처럼 감독은, 우리네 삶을 나약한 풀잎들에 비유했다. 하지만 풀잎들은 결코 나약하지만은 않다.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네 멋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죽은 자들과, 죽음을 결심한 경험이 있는 자들도 풀잎들처럼 올곧게 살아가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 삶이 나약하고 수줍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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