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하나로 정리될 수 '없다'
굉장히 의미있고도 와닿는 책을 만났다.
바로, 철학에세이<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내세웠다는 '새로운 자아 개념인 '분인(dividual)'에 대해 정의내린 에세이인데, 나는 이 책에 아주 깊이 매료됐다.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란 무엇인가>를 접한 후, 저자의 사상과 문체가 마음에 들어 그의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은, 저자가 내세우는 '자아의 새로운 개념'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가 아닌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고 정리해내는데, 처음 접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설명에서 이질감이 아닌 '거의 절대적인 공감'을 하며 읽어내려갔다.
우선, 저자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는 '육체'에 의존한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저자가 제안하는 '분인'이라는 것은 '나눌 수 있는' 것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정의내리는 개념을 말한다.
읽고보니 일리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토록 '자아 의식'을 강조하지만, 우리 속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 감정들은 어떠한 타자와의 접촉(상황)이냐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저자의 주장은, 개인이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내린다면 누굴 만나고 어떠한 책이나 영화를 접하든 일관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가 표리부동을 일삼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정의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으니, 필자 본인만으로 국한시켜봐도 저자의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다. 누구나에게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 책, 그림 등이 있듯 우리는 어떠한 타자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점을 간파하고 융통성있는 개념인 '분인'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정한 자아'라는 말 자체가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만약, 한 명의 인간이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는 아주 명확하게 정의내려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정의내리는 '다양한 모습의 나'로 살아가고 있다. 분인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분인이 정의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타자'다. 그것은 타'인'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닌 사물 혹은 동물이 될 수도 있다.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분인을 설명하기 위한 필수요소다.
저자는, 인격을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패턴'이라 정의내리면서 타자와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이별(죽음)에 근거한 분인의 정의도 빠뜨리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사귀느냐에 따라 당신 안의 분인 구성 비율이 변화한다. 그 총체가 당신의 개성이 된다.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다르다면, 그 까닭은 교제하는 사람이 바뀌고 읽는 책이나 사는 장소가 바뀌어서 본인의 구성 비율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에서처럼 어떠한 환경에서 누구와 커뮤니케이션하는가에 따라 분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또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우리가 쉽게,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왔고 말해왔던 '단 하나뿐인 자아'라는 갑갑한 자아에 대한 정의에서 벗어나 분인이라는 '보다 넓은 개념'을 통해 우리를 갑갑함에서 해방시킨다. 분인이라는 개념을 수용하면 보다 편안한 인간관계를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아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을 찾기보다 다종다양한 타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분인의 집합체가 '나'라는 것임을 정의하는 <나란 무엇인가>는, 인문학 열풍이 한창인 이 시대에 '짚고 넘어갈 만한 의미있는 책'이다.
새로운 '개념 정리'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필자는 이 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과학에 근거해 요목조목 증명해나가는 책은 아니지만, 가슴이 '옳다'고 인정하고 공감시킨 책인 만큼 마음이 혼란스러운 독자들에게 권하고픈 책이다.
저자가 정의내리는 '분인'을 요약하면,
개인을 정수 '1'이라고 치면, 분인은 분수다. 사람마다 대인 관계 숫자가 다르므로 분모는 제각각이다.
그리고 이점이 중요한데,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분자도 바뀐다.
- p. 88에서
분인은 반드시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 p. 142에서
인간은 타자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분인의 집합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 절반은 타자의 덕이자 타자의 탓이다.
- p. 206에서
[책 속에서]
인간은 복숭아가 아니라 양파라는 얘기다. 복숭아는 한가운데 씨가 들어 있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확고한 자아(=진정한 나)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 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나 속성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 p. 61에서
인간은 가만 내버려두면 대인 관계마다 각각 다른 분인이 된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개인'이라는 정수적인 단위로 통합하려는 힘도 작용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 두 가지 레이어-층-을 왕복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 149에서
분인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이 거북하고 꺼려지는 이유는 타자를 일절 필요로 하지 안고 스스로에게 취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뭐, 그럼 좋을 대로 해'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분인이 조다는 사고방식은 반드시 한 번은 타자를 경유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는 역설이야말로 분인주의의 자기 긍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 p. 156에서
무릇 사랑이란 '연애'에만 한정되지 않고 자식 사랑, 형제 사랑, 스승과 제자의 사랑, 고향 사랑 등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런 감정들은 모두 단기간에 불타오르는 '연'의 성질과는 다른 계속성이 기대된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마음 편하고 좋다. 좀 더 말하면, 상대가 어떻든 간에 나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꿈을 꾸듯 황홀하다.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러니 지속하는 관계란 서로가 주고받는 헌신이 아니라 상대 덕분에 각자가 스스로 느끼는 어떤 특별한 편안함이 아닐까?
- p. 170에서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 p. 17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