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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깊이에의 강요>

삶의 답을 찾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있다

독특한 발상력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발현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독특한 발상력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발현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필자는 그의 오랜 팬이다. 그의 작품들 모두를 좋아하는 편이고, 관련 영화 및 연극 작품들도 꼼꼼히 챙겨 볼 만큼 팬심을 지니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는, 약 4년 전에 처음 접했고 이번이 다시 읽게 됐다. 책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시 읽어도 "아!"를 내지를 만큼 공감의 감탄을 지닌 작품'이라는 것.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소설들과 한 편의 작가에세이로 구성돼 있다. <깊이에의 강요>는, 한 평론가가 재능 있는 여성 예술가에 대해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없다'고 평론한 것에 대해 예술가가 그 평에 집착하면서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 작품<승부>는, 체스를 두는 두 남성과 그들을 둘러싼 군중들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젊고 매력적인, 하지만 이렇다할 실력은 갖추지 못한 이와 오랜 경력과 웬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지만 과감한 혁신은 시도하지 못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체스고수가 체스 대결을 한다. 군중들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웬지 이길 것 같은' 젊은이 편을 들면서 그들의 욕망을 젊은이에게 은근슬쩍 투입시킨다. 객관성에 근거한다면, 고수의 승리가 불 보듯 뻔하지만 그들은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는 욕망을 젊은이로 하여금 대리만족하려 한다. 실질적인 도전엔 하지 못하면서 진취적이며 혁신적인 사상에 대한 욕망은 가득한 군중들…. 그들의 모습들은 우리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습,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막상 실행은 하지 못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들과 말이다. 세 번째 소설<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죽음을 앞둔 뮈사르가 미지의 독자들에게 생의 중요하고도 곧포스러운 경고를 하는 작품이다. 세 소설들 가운데, 상상력과 상징성이 가장 가미된 작품이다. 세상이 영혼 없이 부식되어가는 돌조개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는 주인공은, 메말라가는 인간사를 풍자한다. 그의 경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종말에 가까워지고, 그것을 듣는(읽는) 독자들은 왠지 모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저자의 고뇌와 독자에 대한 물음이 담긴 자전적 에세이<문학적 건망증>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책을 포함해 수많은 텍스트들에 익숙해져있는, 그리고 그 활동을 갈망하고 끊임없이 실행해나가는 독자들에게 어쩌면 이 에세이는 '독서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다소 위험한 내용이지만, 공감하며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은 결국 '인간의 한계(망각)'를 드러내는 '슬픈'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망각 '덕분에' 배움과 창조에 대한 욕구가 거듭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와 동시에, 읽혀도 금세 잊혀지고 마는 문학작품들의 가치에 대해서도 물음한다. 수많은 책들을 접했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것(심지어 제목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이 없어 고뇌를 표하는 그이지만, 핵심적인 메시지 만큼은 확실히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다. 결국,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이 에세이에서 저자가 읽었고 나아가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앞선 세 소설작품들을 아우른다. 이 말은 즉, 우리 삶의 방향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고 읽고 들어오더라도 결국 우리가 설정하고 향해가기에 나름이다. <깊이에의 강요>에 있어, 결국 타인들의 시선과 그 잣대에서 비롯된 자신의 재능에 대한 불신에 의해 끔찍한 결말을 맞는다. <승부>에서 역시, 군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체스고수는 승리했지만 패배한 것만 같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는,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승리까지 패배로 여기고 만 것이다.


책<깊이에의 강요>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지닌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동시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역량을 십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작품인지라,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접할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저자의 고뇌처럼, 책의 내용들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잊혀져가게 마련이지만 어찌됐든 강조되는 메시지인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들 중, 독서는 중요한 활동에 속한다. 그러니, 나는 또 읽을거리들을 찾을 것이다. 부지런히, 타인들의 평가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말이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존/자신감'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을 믿고 자신의 길을 걷는다면 그 어떠한 패배(적어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만큼은)도 없을 것이다.



[책 속에서]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p. 15에서


그러나 물론 그는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p. 44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p. 87-88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적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p. 92-93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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