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 <벌새> 리뷰,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높은 교육열, 어느 정도의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치동. 하지만 모든 이들이 '대치동의 이미지'에 걸맞게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벌새>의 '은희(박지후)'가 그랬다. 그녀 뿐만 아니라 그의 엄마(이승연)와 언니 '수희(박수연)', 은희가 마주치는 많은 여성이 그래왔다.


영화 <벌새>는 1994년, 대치동에서 살아가는 중학생 소녀 은희의 삶을 그린다. 소녀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이 영화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베네통 백팩을 메고 다니는 은희는 대치동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아빠(정인기)의 무시와 오빠 '대훈(손상연)'의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부모는 대훈의 입시에만 혈안이 올라있을 뿐, 딸들은 뒷전이다. 수희는 대치동에 살지만 공부를 못해 강북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중이고, 은희는 틈 나면 잠만 자고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해 친구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문제아'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잦은 폭력을 당하고 살아오던 은희. 하지만 그녀에게 멘토 '영지(김새벽)'가 등장한다. 한문교실 선생님으로 온 영지는 은희 또래의 친구들이 봐왔던 꼰대 같은 남선생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은희는 어리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영지에게 이끌린다.



<벌새>는 은희의 성장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들의 무시는 물론, 절친 '지숙(박서윤)'과 남자친구, 은희를 동경(혹은 사랑)했던 '유리'에게도 배신당한다.


은희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혹'이다. 이 혹은 은희의 성장과 함께 자라난 고통의 표상이다. 이 혹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살을 찢는 고통을 감내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흉터가 된다. 더 쓰라린 상황은, 혹 때문에 가족의 관심을 받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뿐이었다는 것이다.



영지의 말처럼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은희가 겪어온 상황들이 그렇다. 영화 속에 있는 은희가 가엽고 불쌍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녀를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도 저마다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지만 그들의 진짜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은희 역시 힘겨운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많은 이들의 위로로 견뎌내고 있다. 영지 뿐 아니라,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들의 작은 관심들도 은희의 삶에 힘을 보탰다.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의 연속인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가족의 자살 등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고통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는 은희의 삶도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날갯짓을 반복해 다시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가 1초에 최대 90번의 날갯짓을 하며 자신의 생에 최선을 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영하의 바람> 리뷰, 혹독한 성장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