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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정철의 '사람 내음',
책 <사람 사전>

<사람 사전>은 카피라이터 정철이 사람과 관계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로 정리한 책으로, 참신한 기획이 돋보인다.



저자가 사람을 주제로 사전을 만드는 이유는 '언제나 사람을 먼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1234개의 단어에 대한 정의는 진지함, 웃김, 독특함 등 다양한 매력을 지닌다. 책이 빛을 보기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책을 접한다면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질 것이다.


이 책은 소설처럼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사전을 접하듯 원하는 단어를 선택해 읽으면 된다. 저자가 선택한 단어는 책의 뒤편 '찾아보기(362~368쪽)'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책을 앞에서부터 읽는 것이 습관인 나는 당연히 'ㄱ'편부터 접했는데, 읽다보니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훑어보던 중 '찾아보기'를 발견하게 됐다. 이 부분이 책의 앞쪽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찾아보기'를 통해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관심을 뒀던 단어들의 정의를 찾아 읽었다. 가장 먼저 찾은 단어는 (예상했겠지만)'사랑'이다. 저자 역시 특별한 단어로 생각했는지,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한 페이지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같이 있어주는 것. 같이 걸어주는 것.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 같이 울어주는 것.

같이 웃어주는 것.

이 모든 문장에서 '주다'라는 개념을 빼면 사랑.

사랑은 같이 있는 것.

같이 걷는 것. 같이 비를 맞는 것.

같이 우는 것. 같이 웃는 것.


다음으로 찾아본 단어는 '가족'. 이 단어에 대한 정의 역시 한 페이지에 펼쳐져 있다. '한 우산을 쓴다. 우산 하나에 다 들어간다. 우산이 작거나 찢어져 아빠 엄마 어깨가 젖더라도 새 우산을 펴지 않는다. 좁을수록 가까워진다. 젖을수록 가까워진다. 강한 비는 그리 오래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정'은? '약간의 사랑. 약간의 믿음. 약간의 존경. 약간의 감사. 약간의 배려. 약간의 기대. 이 약간들을 다 섞은 후 거기에 약간의 질투까지 섞으면 우정 완성'


애독자라면 '독서'에 대한 정의도 궁금해할 것이다. 이 단어 역시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한다. '나는 책을 읽고 책은 나를 읽고. 책과 내가 마주보고 서로를 읽는 것이 독서. 나도 그렇지만 책도 맨날 똑같은 나를 읽으면 재미없겠지. 싫증나겠지. 책에게 늘 새로운 나를 보여주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독서다'


독서에 대한 정의는 감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참신했다. 책에게 나를 보여주는 활동이 독서라니. 우리가 다른 책을 골라 읽듯, 책의 시점에서 우리 역시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 이 독특한 발상을 접한 순간, 접하는 책의 범위를 넓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외에도 좋은 해석이 많다.

가슴: 사람의 중심. 중심과 중심이 만난 다음 팔과 팔이 만나는 것이 포옹. 중심과 중심이 만난 다음 입과 입이 만나는 것이 키스. 중심이 차가우면 포옹도 키스도 없다. 내 주위가 늘 찬바람 씽씽 부는 한겨울이라면 그건 기온이 차가운 게 아니라 내 체온이 차가운 거다. 내 중심이 차가운 거다.

얼음: 겨울이 만들고 여름이 사용한다. 오늘 내가 시간을 쏟아 만들어내는 것의 가치를 오늘이 몰라줄 수도 있다.

일등: 남을 이김. 일류는 아닐 수도 있음.

일류: 나를 이김. 일등이 아니어도 좋음.

처음: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처음. 모든 게 서툴러 어렵다. 처음의 뒤를 잇는 것이 다음.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어렵다. 처음도 어렵고 다음도 어렵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건 같음이다. 처음과 다음이 같음.

커피: 눈이 마시는 음료. 우리는 입으로 액체를 마시며 동시에 눈으로 그 진한 색깔을 마신다. 커피의 진함 속엔 추억, 설렘, 용서, 차분, 응원 같은 것들이 고요히 스며들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추억을 마시는지, 누가 설렘을 마시는지, 누가 용서를 마시는지 알 수 없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마시는 같은 진함. 이것이 커피의 잔잔한 매력이다. 만약 커피가 투명한 색이었다면 지금처럼 넓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커피숍: 건물마다 하나씩. 교회를 이겼다.

키스: 함무라비법전에 충실한 준법 행동.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에는 입. 조금 더 들어가면 혀에는 혀.


키스에 대한 정의. 깔끔해서 참 좋다. 그렇다면 저자의 직업인 '카피라이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의 내렸을까. '오전엔 껌 팔고 점심땐 약 팔고 저녁엔 술 팔고 다음 날 아침엔 다시 옷을 파는 사람. 세상 직업을 다 경험하는 사람. 그러나 세상 직업을 다 경험한다는 건 어느 한 직업에도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넓음과 깊음 둘을 다 갖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 얕음의 진솔한 고백 또는 진지한 핑계.'


접할수록 매력 가득한 책이다. 물론 이 서평을 모든 단어를 접하고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오늘 밤엔 어떤 단어의 뜻을 접해볼까. <사람 사전>은 머리맡에 두고, 오늘 하루의 내 기분과 경험한 사건에 대한 정의를 찾아 읽음으로써 '소통의 맛'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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