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 <도망친 여자> 리뷰

허기진 마음에 일렁이는 파도

쌉쌀한 여운을 남긴 영화 <도망친 여자>. 그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마음의 짐과 동행하는 '감희'(김민희)의 여정은 쓸쓸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감희는 남편이 출장 간 동안 세 명의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다. 이혼 후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영순'(서영화)과 고기와 술을 즐기고, 부모로부터 독립해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로 이사한 '수영'(송선미)과 와인을 마신다. 우연히 들른 영화관에서는 감희의 옛 연인과 결혼한 '우진'(김새벽)을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단지 감희와 오랜 지인이 식사와 음료를 즐기며 그 동안의 소식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뿐이다. 상대의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감희는 세 사람 모두에게 일관적으로 "남편과 5년 동안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라는 말을 한다. 기분 탓일까. 이 말을 하는 감희의 목소리는 쓸쓸하게 느껴진다. '사랑받는 느낌이 든다'는 말은 꺼내지만 공허해보인다. 애정에 결핍된 사람처럼 자꾸만 음식을 밀어넣는 그녀의 모습에서 언행 불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감희의 하루는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그녀와 비슷한 하루를 경험해봤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붙어있어야 한다던 남편이 갑자기 출장을 가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립한 모습을 부러워하는 상황. 이렇게 영화는 스크린 밖 관객의 일상을 침범해 민낯을 마주하게 한다.


영화는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 않은 감희의 부조화를 상징하는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해 희화화한다. 특히 옛 연인 정선생(권해효)에게 던지는 말과 그녀가 관람하는 일렁이는 파도를 담은 흑백영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감희의 복잡미묘한 심경 변화를 함께 느껴보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관람 포인트이다. 그녀가 만나는 여성 캐릭터들의 내밀한 고백들을 듣는 것도 흥미롭다.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가 호흡을 맞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김민희는 홍상수의 페르소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펌을 한 김민희의 모습은 감희의 복잡한 심경을 오롯이 담아내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 영화는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인 은곰상과 부쿠레슈티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공개 석상에서 보기는 힘들지만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홍 감독. 그의 팬으로서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