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책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 그의 사색과 통찰력은 늘 감탄의 감성을 줬고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내게 주변을 돌아보게, 그리고 사색의 힘을 알려줬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책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중국의 알랭 드 보통이라 불리는 '량원다오'의 신작으로, 그가 2006년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매일 한 편씩 써내려간 자기 해부의 시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자신의 내면을 향해 던지는 작은 돌멩이며, 그의 극단적인 자기해부를 통해 상처와 슬픔을 낱낱이 폭로한다. 저자 스스로는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에 대해 '여정 중에 몰래 술병을 핥은 결과'라고 말하는데, 이는 달콤함과 몽상, 타락과 위험 등 모든 의미를 함축하는 묘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은 한 마디로 감동이었다.

읽는 순간순간 가슴이 벅찰 때도, 눈물을 와락 쏟고 싶을 정도로 슬플 때도, 내 가슴을 송두리째 덜어 낸 듯한 공허함도, 나와 관심사가 같은 어떤 것에 대한 공감 등.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속 대부분의 글들은 이렇게 다양한 감정선을 건드려 결국 내게 감동의 선물을 선사했다.


옮긴이 김태성은 프롤로그에서 이같이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픈 존재다. '쇠함'과 '사라짐'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지닌 존재다. 인간의 삶이란 조금씩 사라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호모 트리스티아. 삶의 깊이란 곧 슬픔의 깊이다. 그 깊숙한 곳에 우리가 놓쳐버리는 무수한 슬픔의 아름다움이 있다. 반면 웃음에는 깊이가 없다.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한 번의 파안대소로 끝나버린다. 삶은 절대 웃음으로 규정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슬픔과 그것이 만드는 아름다움의 깊이로 규정된다. 이 책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유형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즐거움과 웃음으로 삶의 끝이 정리되지 않는다. 슬픔과 상처, 시련과 고통의 늪의 깊이가 우리의 삶의 기간을 단정하는 듯 하다. 각종 스트레스가 질병을 낳고 우리를 생명의 시간대 위로 올려둔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지나친 우울감 속에서 방황하다 자신의 삶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한다.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보다는 슬픔이 아닐까. 우리는 슬픔을 피하고 보다 긴 삶의 여정을 만끽하기 위해 그의 반대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실, 시중에 '행복'에 대한 책들은 무수히 많이 쏟아져나온다. 행복 추구법, 특히 최근의 행복 트렌드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는 힐링. 또 어느 순간이 지나면 웰빙이 힐링으로 변한 행복의 요소가 또다른 단어로 변해있겠지. 이렇듯 사실 행복은 유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다. 하지만 상처와 슬픔은 다를 것이다. 감히 단언컨대, 예전에 비해 개인이 안고 있는 슬픔의 그림자는 짙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건, 상황은 점점 나아지는데 슬픔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슬픔'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사색이 틀림없이 필요하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제목에서부터 우울하고 비관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인들은 이 책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수없이 SNS를 통해 공유한 량원다오의 뼛속을 관통하는 글귀들 때문일테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 량원다오는 이 책에서 사랑, 이름, 망각, 질병, 용서, 종교, 죽음, 반추, 동거, 빚, 이사 등 일상에서의 사색에서부터 어떤 작가의 책, 어떤 화가의 그림, 어떤 음악가의 음악 등 실존하는 것에 대한 탐구와 해석까지 삶의 모든 사건들을 그만의 생각으로 정리해간다.그가 10월 26일에 작성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라는 일기에서 그가 '인간의 모든 감정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조정과 몸부림이 아닐까'라고 써냈듯, 감정은 내외면의 조절 속에서 늘 유동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가끔은 아리송할 때도 있다. 과연 주장을 위한 글인지 풍경을 담은 글인지, 혹은 우리를 설득하려는 글인지 한 글에 대한 목적의식조차 모호하게 여겨지는 글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생각을 읽고 우리만의 사색을 즐기면 그 뿐이다.


10월 10일 '이야기의 생명'에서 량원다오가 받은 문자 메시지에는 "네가 들려준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너의 일부이니까."라고 적혀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폭넓은 경험으로부터 이야기의 윤곽을 담금질해낸다는 그의 글처럼, 우리는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투여한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대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량원다오의 사랑에 대한 관점은 행복이 아닌 우울에 가깝다. 그에게는 사랑 역시 상처로 정의내려진다. 11월 2일 '깊이'에서 그는 뤽 베송 감독의 <그랑부르>를 예로 들며, 바다 속 깊은 곳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잠수해 내려가다가 결국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을 사랑에 비유해낸다. 현대 언어학의 경전인 <삶으로부터의 은유>에서 그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던 '상하上下'의 개념으로 사유방식과 문화가 구성되는 모습들, 가령 '점수가 오르내렸다' '감정이 고조되고 저조되다' '천국에 오르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라는 숱한 표현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사랑은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깊이'를 따진다며 놀라운 주장을 펼쳐낸다. 사랑은 깊을수록 좋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이 결국 무겁고 침울하며 나아가 무서운 것이라는 결론으로 정리된다. 또한 우리가 로맨스 영화에 갈망하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우연들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영화를 관음하며 실제로 우리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스크린 속의 인물들을 통해 대리만족한다. 그의 표현들에 있어 슬픈 것은 '시작'에 대한 그의 관점들 때문인데, 10월 4일 '맨 처음'에서 '아름다운 모든 것은 지나치게 발전하지 말아야 한다. 새싹의 상태로 클 듯 말 듯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이 가장 아름답다. 종이에 닿지 않은 펜이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이 일단 시작되면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쇠락과 시듦이 있다.'는 그의 의견. 사실, 정점에 이르면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슬픈 건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마저 결국 지속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겁먹음이다.


저자가 '편지'와 '통신(실시간)'에 대한 각각의 글을 적은 것도 흥미롭다. 우리에게 편지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서정적인 것, 감성적인 것, 정성이 담긴 것,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표현들이 편지의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량원다오는 편지는 과거의 발신자와 현재의 수신자의 시점이 달리 작용되는 것이다, 라는 현실적인 주장을 펼친다. 발신자가 편지를 쓰는 시점과 수신자가 편지봉투를 뜯어 글을 읽어내려가는 시점이 다른 건 현실이다. 현실이기에 슬펐다. 편지, 과연 좋은 것일까? SNS를 통해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모두가 '좋아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순응했다. 나 또한 좋은 것으로만 여겨왔으니까. 저자가 주장하는 '과거의 메아리'인 편지, 라는 의견에 또 한번 감탄했다. 한편, '통신의 발달'로 인해 인내가 사라진 점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과거,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편지를 부친다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후 기다린다거나 하는 등의 활동 이후에 목적 없는 기다림으로 온 마음을 다해온 우리들이지만 현재 '실시간 붐'이 일어난 후에는 상대의 피드백이 없으면 실망하고 그것조차 기다리지 못해 전화를 하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혹은 빠른 답변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답변이라 여기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현대의 삶에서는 기다림이 사라진 것이다.


이 모든 현대의 삶 위에서 량원다오는 슬픔을 발견하고 사색을 쉬지 않았다. 특히, 현대인의 삶을 잘 담아낸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설명하는 9월 16일, 18일의 글에서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빈 방의 햇빛>으로 우리네 자화상에 담긴 슬픔을 직설한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의 저자만이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은 슬픔, 고통, 고독 등의 이름을 지닌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 <빈 방의 햇빛>


호퍼가 그린 집은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극도로 깨끗하다.
그가 그린 인물화만큼이나 무정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그린 마지막 작품 <빈 방의 햇빛>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간판 같은 광선만 남아 있고 방바닥과 벽에는 그림자가 만들어낸 기하학적 편린 몇 조각이 있을 뿐이다. 창문도 보인다. 창밖의 나무 그늘 아래에는 뚫고 나갈 수 없는 깊은 침울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방이 왜 그렇게 넓은 것일까. 아무도 그 방에 살지 않았다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 수 없다. (중략)
<빈 방의 햇빛>은 호퍼의 예언이자 호퍼 자신을 위해 쓴 추도사다. 사람이 떠나고 방은 비지만 햇빛은 여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그가 떠나도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September 18 '아무도 없는 방' 중


책을 읽는 동안 참 많이 침울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 뒤집어 생각해보니 이해 가능하다는 점들을 미루어 보면 나 또한 상처 안은 인물임이 확실하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상처의 이름들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 상처들로 하여금 자신부터 돌아본다면 소멸해가는 우리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책에 대한 평을 마무리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모래알 프로젝트]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