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 <밀양> 리뷰,
신을 향한 인간의 물음

<밀양> 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존재에 대한 뜨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 존재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각하고 인식하고 개념화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니까 신, 법, 질서, 윤리와 같은 삶의 모든 개념적 지평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의 무게 자체가 이미 만만치 않듯이 영화는 둔중한 질문을 아프게 집요하게 되묻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밀양>을 매우 피곤한 작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애써 은닉하고 살아가고 있는 남루한 삶의 실체를 마치 살갗을 벗겨내듯 따갑게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창동 감독은 여러번 "이 영화는 하느님, 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만큼 이 영화가 신에 관한 영화임을 증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밀양>은 개념으로 구성된 세계와 실제로 체감하는 세계와의 간극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애가 처한 곤란 역시 이 두 세계의 충돌에서 빚어졌다. 그녀의 관념 속에서 돈 많은 과부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현실은 나약한 범죄의 대상에 불과하다. 한편 신은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궁극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소불위하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신은 관념의 세계에서 완전한 질서이며 규범이고 또한 윤리이다. 그래서 신이 제시하는 모든 원리는 마치 진공 상태에 놓인 사물처럼 완벽하다.


<밀양>이 용서에 관한 영화가 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관념의 세계 속에서 잘못은 용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고 고통은 용서하는 순간 삭감될 수 있다. 죄 지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그를 용서해야 하는 역설 속에 신이 많은 세상의 법칙은 압축되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구성된 세속의 인과응보의 건너편에 놓인 원대하고도 추상적인 용서의 개념 말이다.



신애는 거듭 신의 존재, 영향력에 대해 시비를 건다. 충실한 기독교 신자를 유혹해 간통을 유발하려 하고, 자신의 목숨을 헐값에 취급하려 하기도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게 압축된다. "신이 있다면 왜 이토록 한 사람에게 가혹한 아픔을 줄 수 있습니까?" 라는 물음 말이다.


<밀양>에 묘사된 신은 하나를 잃은 자에게 위로가 아닌 또 다른 상실을 보태주는 신이다. 그 가혹함은 보는 이마저도 아프게 할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작중 묘사된 상황이 꼭 특수한 영화적 허구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지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한 고생으로 내몰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부모 없이 어렵게 자라난 사람이 일찍이 배우자를 잃고 사업에 실패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영화는 "신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그리고 "신의 결정은 왜 그토록 혹독한가" 라는 물음으로 계속된다. 결국 여자가 선택한 방법은 신이 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경멸'이다. 마치 신과 대결하듯 여자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자 한다.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사람의 일이라는 게 예측 불가능한 오류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고 선이 악을 추방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상 우리의 삶 속에는 정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보여준다. 삶은 애초부터 불공평하다. 이 불공평한 실제의 삶에 대한 변명과 빌미가 바로 관념의 구성물인 신이다. 신은 이 불완전한 인간의 삶, 예측 불허한 오류 투성이에 초월적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파워 오브 도그> 리뷰, 우아한 복수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