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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에서의
좋은 문장들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 '모든 요일의 기록'. 카피라이터인 저자 김민철은 스스로의 나쁜 기억력 때문에 꼼꼼하게 기록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나 역시 기억력이 썩 좋지 못해 블로그를 포함한 기타 매체에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동질감을 느껴 '피식'했다.


아래는 저자가 인용한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이라는 작품 속의 글귀다. 책을 읽다보면, 하나의 다양한 작품의 좋은 문장을 발견할 수 있어 좋다. 덕분에 다음에 읽어야 할 책 리스트 고민을 덜 수 있다. 카뮈의 작품 외에도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이라는 책도 소개되는데, 읽어볼 예정이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안 올 순간을 기록하고, 훗날 추억을 위해 반드시 어딘가에 방문하면 사진을 찍는 내가 깊이 공감한 글귀.



하지만 동시에 또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평생 찍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찍는 순간은 어쨌거나 나만의 순간이 된다는 것을


'나만의 순간이 된다'는 글이 참 좋다. 나의 시선, 나의 시간이 반영된 사진은 온전히 나의 것이 맞다.


여행의 모순. 새로운 세계를 보러 가지만 우리의 시선과 감정은 왜곡되어 있다. 어쩌면 여행은 일정 순간의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인생을 비극이나 희극으로 만드는 장본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태도는 같았다. 결코 운명 앞에서 구차하지 않았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도 범인이 아니었고, 야근도 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파리도 범인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이클 커닝햄의 이 구절이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아무리 원망을 하고 있어봤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바꿀 수 있는 건 이 일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소설을, 그 외 콘텐츠들을 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을 키우기 위함이 아닐까.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소설책을 편다. 거기 다른 사람이 있다. 거기 다른 진실들이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진실을 돌려주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의 사건이나 콘텐츠를 접해도 모두의 이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자.



그러나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꾸준한 노력을 이길 것은 없다. 지속과 관성의 힘!



계속했으니까. 몸에게 시간을 줬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머리의 말을 몸이 알아들은 거니까. 계속하는 거다.

잘 쓰기 위해 잘 살기! 대단히 어렵지만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는 삶.



결국 잘 쓰기 위해 좋은 토양을 가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쓰다'와 '살다'는 내게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생각할 여지를 주는 에세이. 뒤늦게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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