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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번 칸' 리뷰,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혹자는 <비포 선라이즈>의 두근거림을 상상하겠지만 <6번 칸>의 로맨스는 꽤 거리가 있다.

<6번 칸>은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세이디 하를라)'가 동경하던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무르만스크(Мурманск)로 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본래 이 여정은 연인인 '이리나'와 함께하기로 했지만, 홀로 기차에 탑승한다. 그녀가 탄 2등실 6번 칸에는 강렬한 기운을 뿜어대는 러시아 남자 '료하(유리 보리소프)'가 앉아있다.

보드카에 취해 술주정을 하고 객실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소시지를 먹다 테이블 위에 던져버리는 등 매너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료하가 불편한 라우라는 식당칸에서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문을 닫는다는 말에 다시 6번 칸으로 돌아간다.



라우라에게 "몸 팔러 가냐"라는 무례한 질문을 퍼붓는 료하. 핀란드어로 "사랑해"가 뭐냐고 묻는 료하에게 "하이스타비투(엿 먹어)"라고 대답하는 라우라.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은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관계도 진전된다. 미운 정이 쌓인 건지, 동료애인지, 인류애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쌓여 친밀해진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가 봐도 피하고 싶은 료하와 사랑에 빠진 라우라가 의아할 수 있지만 사랑이란 게 그런 법이다.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만의 동기와 시그널이 있다.

라우라와 료하의 여정은 둘의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홀로 춥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겐 고독과 음울한 정서가 내재돼 있다. 이들을 태운 기차는 비좁은 길을 따라 달리는데, 밀어내려는 라우라와 다가서려는 료하의 감정선을 반영하듯 덜커덩거리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가까워진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급류를 향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흐르다가 둘 사이의 좁은 틈 사이를 으르렁거리며 마침내 고요한 호수 표면으로 흘러가는 강과 같다"는 표현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메인 포스터에 쓰인 '평범한 로맨스 서사를 초월한 영화(Radio Melbourne)'라는 리뷰 카피처럼 여행 도중 만난 이와의 사랑을 그린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묘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로맨스 영화 <6번 칸>.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 묘사와 거침없는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넓은 설원 위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휴대전화, SNS, 구글 지도도 없는 1990년대 아날로그 여행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6번 칸>의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당시의 감성을 스크린에 녹이기 위해 의상과 로케이션뿐 아니라 촬영 형식까지 신경 썼다. 촬영 감독 야니-페테리 파시는 Kodak 35mm로 촬영해 스크린을 통해 90년대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을 담아냈다.


<6번 칸>은 제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제94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 영화상에 핀란드 대표작으로 출품되어 1차 후보로 지정되었으며, 제79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제79회 핀란드 아카데미 유시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 분장상까지 8관왕을 차지했다. 이 외에도 전 세계 유수의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인정받으며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화는 핀란드 대표 작가 로사 릭솜(Rosa Liksom)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원작의 목적지인 모스크바를 무르만스크로 변경했다. 시대 배경은 원작의 1980년대 소련의 모습 대신 1990년대 후반으로, 캐릭터의 나이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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