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글을 읽고, 미술을 감상하거나 지인의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싼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하면 가장 먼저 고령(高齡)이 연상된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들 중 최고령자인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나의 어머니가 더 깊이 느끼고 있을 거다.
나는 바란다. 외할머니가 죽음을 맞는 순간, 나의 어머니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기를.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자식의 도리로서 부모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다.
다음으로, 부모의 죽음을 먼 거리에서 접했을 때,
죽음의 장소로 이동하는 긴 시간들의 슬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현재,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살아가는 장소는 자가용으로 네 시간 이상은 가야할 거리다.
과연, 반갑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네 시간의 체감시간은 얼마나 연장될 것인가.
나는 이것을 염려하는 게다.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걱정하면서도,
이기적이게도 나의 어머니가 겪을 슬픔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게다.
망인을 애도하는 마음보다,
망인을 애도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나는 이기적인 인간일까?
이 생각이 명백히 이기성에 의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애석하다.
죽음, 하면 질병과 사고 등의 '원인'들도 떠오른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에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왕이면 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
선택할 수 있다면, 질병을 거부하고 싶다.
그래서. 사고사를 선택하고 싶냐고?
사고는 선택할 수 없다. 선택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사고사를 가정한다면, 질병을 앓는 것보단 고통을 느끼는 시간이 짧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운명은 실로 가혹하다.
또한, 남은 자들과의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 또한 '나쁜' 상황이다.
어쨌든 죽음은, 온갖 부정적인 껍질 안의 핵이다.
원인과 결과를 놓고 본다면 명백히 부정적인 것이며,
그래서 때로는 죽음과 결부된 것들 때문에 신(神)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죽음을 떠올리는 게 나쁘기만 할까?
이렇게 내가 죽음이라는 소재로 생각하고 글을 적어나가는 게 잘못일까?
나는, 명백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적으며, 나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처럼
나 역시, 나의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요즘의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라는 걸 느끼고 있다.
나의 외할머니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나의 어머니는 얼마나 더 깊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한 번 안아드렸다.
포옹 안에는, 연민, 걱정 등과 함께 사랑도 섞여 있다.
결국, 죽음을 염두에 두고 나와 타인의 목숨이 한정적이라는 걸 떠올려 봄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양한 원인들의 죽음을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을 염려하고 그것을 유지·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좋은 습관을 실천화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올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다짐하고 생활한다.
우리는 죽음을 떠올려야만 하고,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마음 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