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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몰리션>

파괴의 치유력

<데몰리션>은 제목 자체가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파괴 혹은 해체. 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데몰리션이 등장한다.


주인공 데이비스는 갑작스레 아내를 잃는다. 한순간을 기점으로 데이비스의 환경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물론, 데이비스 자신은 이전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며 삶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아내가 죽어도 슬프지 않았다'고 고백할 때, 나는 데이비스의 모습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의 내면을 얼핏 봤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데이비스에 대해 느꼈던 첫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됐다.


아내가 죽은 후, 병원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꺼내먹으려는데 이 작은 상황조차 데이비스를 성가시게 만든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팠고, 방금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자판기에 대한 불만이 배가됐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 즉 아내 앞에 붙어야 할 수식어를 표현하지 못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땐 미처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몰랐던 사실. 아내를 사랑했었다는 사실. 데이비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아내가 사라진 후에야 깨닫고 만다.


영화는 데이비스가 마음을 다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사실은, 그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소홀해왔던 사람들, 스스로가 움켜쥐지 못하고 타인(장인)에 휘둘려 살아왔던 삶을 발견하게 된다. 아내의 죽음은 달리 생각해보면 데이비스에겐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기회'로 적용된 셈이다.



아내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데이비스에게 많은 사람들은 비난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자판기 회사 고객센터 직원 '캐런'이다. 그녀는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러면서 데이비스가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되짚어보면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캐런과 그녀의 아들 덕분에 데이비스는 조금씩 자신을 찾아나선다. 물론, 그 방법들이 그다지 정상적이지는 않다. 과거의 모든 것들을 부수고 해체하는 것. 데이비스가 선택한 방식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황판단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가. 이 '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분석해야 한다. 데이비스가 분석을 위해 사용한 방식, 해체! 부수고 해체한 후 그것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데이비스는 '진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스스로 부수고 스스로 조립하는 과정은, 성장의 과정을 상징화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다양한 '상실'을 경험한 데이비스는, 상실을 복권하기 위해 다소 괴팍한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잘못된 방식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리셋'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데이비스의 장인이 던진 대사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를 몸소 실현함으로써 미처 자신도 몰랐던 자아발견을 하게 된 데이비스. 그의 삶은 분명, 이전보다 따듯하게 나아갈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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