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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 <시간>

사랑은 시간과의 동행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대해 많은 관객들은 불편하다고 말한다. 김 감독의 전기(前期) 영화 속 인물들은 대사보다는 행동과 눈빛 따위의 표정들로 감정을 전한다. 감정! 우리는 김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 그러니까 그들의 내면을 간파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내면을 가장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김 감독의 작품은 불편하게(어렵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시간 Time, 2006>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설적이다.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다고들 말한다. 대개 그 기간의 평균을 약 3년(900일) 정도로 보는데, 어떤 이들은 그보다 훨씬 일찍 사랑의 온도를 낮추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오랜기간 사랑을 유지하고 더욱 깊은 관계를 쌓아간다. 사랑 만큼 주관적인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열정적인 감정이기에, 온도의 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희와 지우는 오랜 연인 사이다. 세희는, 지우의 사랑이 변했다고 여긴 후 홀연히 사라진다. 세희는 지우와 함께였던 시간들을 모두 없애고 새 사람이 되겠다 결심한 후 성형수술을 감행한다.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한다.



자연스럽게 쌓아왔던 지우와의 시간들은, 계획적으로 흩어진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사랑이라는 고결한 가치는, 퇴색된 시간 앞에서 무너진다. 세희의 성형수술 감행은, 무너진 시간들을 공중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시간들을 쌓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세희는 이름까지 '새희'로 바꾼 후, 결연한 의지를 안고 지우를 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지우를 찾아간다. 세희가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만 지우는 본능에 이끌려 '새희'와 사랑에 빠진다.



새 사람이 된 새희는, 지우와의 추억이 서린 곳에서 새로운(하지만, 완전히 새롭지만은 않은) 사랑의 추억들을 쌓아나간다. 이따금씩 자신을 사랑하냐며 지우에게 묻는 새희. 이에 대해 지우는, 새희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지우는 여전히 세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세희는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외관이 지우의 사랑을 식게 만든 원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착오'였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기에,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은 개인의 발자취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땅 위를 걷는 여행자들이다. 그 시간은, 발자취인 만큼 누군가와 함께 보내온 시간들 역시 삶의 일부이다. 그 시간들이 홀연히 증발된다면 공허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 위에 갑자기 구멍이 뚫려버린다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땅 위에 있던 건물들이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가정해보자. 이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가. 사랑의 지속은 함께 보내온 추억의 깊이와도 연관성이 깊다. 새로운 것이 자극이 될 수는 있으나, 자극이 오랜 기간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더욱이, 시각적 자극은 충동적 욕망에 의한 것이기에 단기간에 질려버릴 확률이 높다.


따라서, 영화 <시간>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작품이다. 대개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은, 달달하고 부드러우며 따듯한 러브신들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시간>은 멜로영화라고 하기엔 다소 섬뜩한 장면들이 다분하다. 그 누구도 몰라보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다던 성형외과 전문의도 내면을 성형할 수는 없다. 진짜 사랑은 시각을 포함한 외적 자극에 의한 충동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관계를 잇게 하는 개인의 내면과 함께한 시간들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즉, 시간의 퇴적이다.


김 감독은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외적 아름다움(변화)을 추구하려던 이는 한순간에 흉물로 변한다. 잠깐의 욕망에 휩싸인 사랑은 한순간에 슬픈 고통으로 변한다. 사랑의 깊이는 분명 함께한 시간과 비례하는 건 맞는 듯 하다. 물론, 사랑의 열정이 식어 이별을 맞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별의 고통이 어떤 경우에 더 오래간 지속되는지를 되새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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