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평등'을 실현할 때, 우리는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이따금씩 '무기력'을 느낄 때가 있다. 삶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때, 건조하다 느끼거나 염증을 느낄 때 우리는 무기력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왜' 우리는 무기력을 느끼고, 또한 그 감정을 되풀이하며 느낄까? 그 이유를 에리히 프롬은 '남이 바라는 나'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프롬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 먼저 평등의 왜곡된 적용을 지적한다.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은,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평등은 '동일함'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반드시 타인과 함께 해야 하고 타인과 동일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마음이다. 이 강박증은 스스로를 '사물'로 전락시킨다. 타인과 같아져야 하기 때문에 온전한 자신의 모습은 퇴색된다. 타인과 '맞춰야'하는 것이 평등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타인과 어우러짐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 최대의 공포를 자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해진다면, 인간이 동물과 어떤 면에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모두가 같아지는 것은 공장에서 만들어 낸 사물과 다름 아니다. 또한 개인의 사생활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이는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반드시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사물은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과 계획을 갖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실존한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삶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자다.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47, 48쪽).' 우리는 자각하고 진술하고 행동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그럼으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자기 인식은 인격을 성숙의 단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자기 인식을 포기하고 동일함에 몸을 맡긴다면 결국 무기력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은 공동체 생활에 적응할 수 없을까? 아니다. 우리는 자기 인식을 통해 사교성을 기를 수 있다. 이는 아이러니로 들릴 수 있지만, 아니다.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는 자는 타인의 실존 또한 존중할 수 있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다. (69쪽)'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안다면 타인에 대한 기대와 욕망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온전한 실존의 원천이며, 자타를 존중하는 태도다. 이는 결국 개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실제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이 모든 장애와 불투명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아를 넘어 타인의 자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와 우리를 껴안는 책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닉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73쪽)'
책의 소재이니만큼, 프롬은 '무력감'을 집중 조명한다. '무력감은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매우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그들 인성 구조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서,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과 그 위험성을 정의한다. 자타인, 상황, 사물에 대한 무력감의 특징을 통해 그 위험성을 알리고 무력감이 생기는 원인들을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무력감은 '공포'의 원인임을 경고한다.
결국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인식'을 해야 한다. 자기를 인식하고 '진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직접 경험'을 해야 한다. 진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프롬은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열린 사고와 경험을 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198쪽)'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프롬은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감탄하는 능력'을 갖출 것이다. 감탄의 능력, 호기심을 갖는 것이 창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다양한 경험과 감정에 집중하면서 자기 인식을 명확히 하라고 권한다. 또 다른 조건으로는 경험으로부터 오는 양극성의 상황들,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통해 자기 인식을 해나가는 것. 그로 인해 삶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기 인식을 제대로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인지하게 되고 그로 인해 '진정한 평등'의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평등은, 동일한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타인과 같아야 한다는 강박, 그로 인해 스스로를 사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태도가 결국 자신을 무력감에 빠뜨리게 만든다.
프롬은 한결같이 '자기 인식'을 강조해왔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지하고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타인과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도 그의 일관성이 엿보인다.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타인과의 사랑, 원만한 공동체 생활도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