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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섬>

사랑과 구원의 장소, 섬


영화 <섬>은, 인간의 욕망을 이미지화하는 데 능한 김기덕 감독의 기량이 여과 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영화에서 내면에 가득 들어찬 욕망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공간은 저수지 낚시터다. 이곳은 은닉과 표출의 공간이다. 섬을 찾는 사람들은 범죄(살인)자, 창녀 등 기본적인 욕망에 굴복당한 자들이다. 물질주의 소비사회 위에서 불안과 공포, 충동에 휩싸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거친 욕설과 충동적 섹스를 하는 등 거친 육체적 표현들을 해댄다. 어쩌면 이것들은 본능적인 요소들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자연스럽다는 의미에서, 낚시터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들은 대립적인 것들의 경계가 없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우주적인 인간세계의 진리 하에, 입과 항문의 경계가 사라진다. 즉, 흡입과 배설이 허물어진다. 저수지의 날씨는 계절과 밤낮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정적(靜寂)이다. 물안개 가득한 새벽과 큰 파도가 일지 않는 오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조차 그 경계가 모호하다. 이것들은 '일체'다. 이렇듯 김기덕 감독 영화들 속에서는 대립되는 요소들의 경계가 없다. 현상학적으로 분리될 뿐이지, 본질은 일체라는 것이다.


저수지를 찾은 '현식'은 욕망에 분노하여 욕망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죽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감독이 끊임없이 주장해온 것들을 근거로 하자면, 현식의 죽음에 대한 욕망은 곧 삶에 대한 욕망이다. 저수지 주인 '희진'은 현식에게 자연의 '순리'를 일깨워준다.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진리이자 본능을 삶으로 변모시킨다.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감독은 이미지화한다. 그 장면은 에필로그에서 두드러진다. 뿌옇게, 화이트 아웃으로 시작되는 에필로그는, 경계의 무너짐을 상징한다. 과거의 모든 악(惡)을 무화시키고 새로운 탄생을 예고한다. 사실, 이 영화의 모든 설정은 본능적이며 자연스러운 것들을 위한 장치다. 만물의 근원인 물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부터가 그랬고, 물 위에 떠 있는 방갈로들이 그랬다. 특히, 작은 배 안에 매장하는 것은 자궁을 상징한다. 주제의 상징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마지막 신에서, 수초는 희진의 음모로 디졸브된다. 자궁으로의 회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희진은 철저히 자연의 신(神)이자 현식의 구원자다. 그녀는 사람들이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거부한다. 또한 생존을 향한 치열한 육체적 투쟁을 가한다. 혀닉의 자살 시도는 배신과 죄의식으로 응집된 것이다. 문명사회의 현실을 희진은 자연(본능)적인 행위들로 치유해준다. 가식과 거짓이 없는 희진의 행위는 가학적이지만 자연적인 몸의 개입이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현식의 고통을 상쇄시켜주기 위해 성 행위를 하는 것은 단순한 충동이라기보다는 의지적이다. 그녀의 몸짓은 어떠한 언어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강렬한 메시지다. 현식에게 사랑을 표현했지만 그는 떠나려 한다. 그러자 희진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궁을 괴롭히며 울부짖는다. 그래서 현식은 다시 희진에게 돌아오고, 희진의 자궁 속 낚시바늘을 빼내 하트 모양을 만든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희진의 의사소통은 언어가 아닌 낚시바늘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징들을 이해한다면, 감독의 영화들을 도덕·윤리적으로 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섬>에서는 사회적 위선과 폭력, 인간세계의 찌꺼기들이 낚시터에 버려진다.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온갖 불결한 것들이 쏟아지는 곳에서는 다양한 대립적 관점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오염된 물을 찾은 오염된 사람들은 결국 오염된 형태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희진으로부터 구원받은 현식의 경우는 다르다. 모성애를 품은 구원자와 같은 희진을 만난 현식은 새 삶을 부여받는다. 혐오와 불결한 것을 '사랑'으로 치유받은 것이다. 육체와 정신으로 결합된 완전한 이해에 의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저수지(섬)는, 폭력과 금기가 서린 은닉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공간은 '사랑이 배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온갖 어둠과 핏빛이 드리워져 있는 영화이지만, 나는 현식과 희진이 방갈로에 노란 페인트칠을 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난다. 최소한 현식에게는 저수지가 '희망'의 장소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섬>은 아름다운 영화다. 궁극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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