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알랭 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의 '일과 행복' 장에 대한 것이다. 드 보통은, 일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자 삶의 목표와 결부되어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어쨌든 '노동자는 불안'하다고 말한다. 대개, 일에 대한 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쪽이 많지만, 드 보통은 '현실을 직시'시킨다. 다시 말해,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걸 직설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은 '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 욕망(목표)이 반영된 것이므로. 더불어, 그로 인해 경제력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목표가 반영되고, 경제력의 수단이 되는 일은 '행복'을 채우기 위한 요소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반드시 행복'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게 드 보통의 생각이다.
이 장을 다시 한번 분류하자면, 필자는 '(1)일과 행복' '(2)일(노동자)의 현실'로 하고 싶다. 장의 전반부는 일의 정의 및 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요소(자기만족, 자기표현 등)들이 나열된다. 후반부는 일터(환경)에서 노동자들이 느낄 수 있는 현실들이 나열된다.
필자가 발췌한 다음 글들을 읽어보면,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리라 본다.
따옴표 안의 글은 본문 발췌이고, '-' 다음 글은 필자가 간단히 정리한 글이다.
(1)일과 행복
벤저민 프랭클린, 디드로, 루소 등과 같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글에서 일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으로 다시 규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일은, 돈의 수단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 중 하나다.
"능력주의는 일자리에 새로운 특질, 마치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특질을 부여했다. 이제 존경받고 보수가 좋은 자리는 지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은 나라는 사람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이제 자리가 내적인 자질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거나,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부패한 수단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 능력주의자가 됨으로써 지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일을 '잘' 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행복과 기대의 관계에 관하여 예리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일을 못했다고 해서 늘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일의 성취에 자존심과 가치를 투자했을 때에만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수치감을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고 무엇을 실패로 여기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라는 이야기다.
- 일은, 자존심과 가치 투자의 장이다.
(2)일의 현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관련법에도 불구하고,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여전히 부차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도구 노릇에 머물게 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아무리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늘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중략)
일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 일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우리의 슬픔을 그나마 다독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