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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여주는 여자>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의 실태 보고서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생활해나가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 그녀는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소문나 있다. 모텔비 포함해 4만원이면, 남자들은 욕구를 채울 수 있다. 제목부터 '죽여주게'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 영화는 '의외의'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필자는, 이 영화에 대해 감상 전에는 앞선 내용들만 담겨있으리라 예상했었다(나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지 않은 채, 감독과 출연배우, 혹은 포스터가 풍기는 분위기를 토대로 감상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하지만, 작품 속으로 들어갔더니, 사회적인 문제가 짙게 배어있었다.



'죽여주는'은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로서도 죽여주는 여자였고, 실제로 타인의 죽음을 돕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소영은 다양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성매매, 살인자. 소영의 수식어다. 하지만 그녀의 이 '사회적인 악행'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소영은 '그래야만 하는' 현실에 부딪친 인물이다.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돈벌이는 극히 드물다. 자신과 좋은 인연을 맺어왔던 남자들은, '제발 행복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말한다. 가족 하나 없는 소영은, 최소한 밥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몸을 팔았고, 타인의 딱한 사정을 알기에 죽음을 온 힘으로 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더욱 슬픈 건, 교도소로 향하는 소영이 '오히려 잘 됐다'며 자조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요양원 갈 돈도 없는 그녀에겐 제때 밥이 나오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셈이다.


영화에는 소영의 삶이 전면에 드러나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을 소개하면서 관객을 사유하게 만든다. 버림받은 필리핀 아이 '민호'의 엄마가 처한 상황, 죽음을 바라던 노인들의 상황은 딱하기 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소영의 이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의족에 기댄 청년, 트랜스젠더, 흑인 이주민 여성이 그렇다. 그런 이들이 삶을 버텨나가는 모습들. 타인의 시선에서는 애처롭지만, 막상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잘 버텨나간다. '이게 뭐, 나빠?'라며 꿋꿋이 살아나간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극히 두드러지는 건 '노인 문제'다. 소영을 인터뷰했던 남자는, '우리나라가 세계 OECD회원국 중 경제 순위 11위인데 반해, 노인 빈곤율은 가장 높다'며 노인 문제의 실태를 꼬집는다. 이 상황에서 과연 노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게다가, 과거에 '잘 나가던' 이들도 세월이 주는 병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들 나이쯤 되면, 번호표 받고 죽음의 문 앞에 대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이듦과 죽음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나의 가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라는 단어를 쓰기에도 찝찝할 만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노인들과 그들의 삶을 둘러봐야 한다.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 문제를 파악해야만 한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 문제의 실태를 보여주는 보고서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사회 문제 직시 뿐 아니라 또 다른 과제도 선사한다. 바로, '웰 다잉(well-dying)'이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어떻게 삶을 잘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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