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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브르 사 비(자기만의 인생)>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은, 주인공 나나의 인생 중 일부를 열 두개의 단편으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나나는 배우가 되기를 꿈꾸지만,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남편과의 이별 후, 자기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레코드숍에서 점원으로 근무하지만, 집세조차 감당하지 못해 힘들어 한다. 급기야 그녀는, 2천 프랑을 구하기 위해 해 죄를 짓는다. 남의 돈을 탐하는가 하면, 성매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호텔방을 돌며 다양한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휩싸이는 나나. 과연 그녀는 '행복'한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 영화가 독특한 점은, 나나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있다. 현실을 위해 쾌락(과 생계유지)을 좇던 나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우연히 만나게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나는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감독은 영화를 12장으로 분절시킴으로써, 맥을 끊는다. 따라서,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다양한 작품을 본 듯한 기분을 사로잡힐 것이다. 따라서, <비브르 사 비>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동시에, 나나의 삶 하나다. 조화롭지 않아보이는 단편들이 모여, 삶이라는 완성작이 된다. 분절의 연출을 통해 고다르는, 대개의 감독들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방식 대신, 타인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연출한다. 동조보다는 관조적 연출을 택한 것이다. 이 '의도'를 위해 감독은, 인물들을 향한 (카메라의)시선을 다양한 위치에서 담는다. 대화 중인 인물들을 뒤에서 찍는가 하면, 쇼트의 크기도 '다양하게(그리고 제멋대로)' 담는다. 나나의 얼굴은 클로즈업되기도 하고, 목선이 잘리기도 한다. 때로는 인물보다 오브제들이 강조되기도 한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야, 초반부에 고다르가 인용했던 몽테뉴의 말이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다.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으려면 너를 줘버려라' 나나가 택한 자기만의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삶'이었을까? 물론, 나의 관점이지만, 나나의 삶은 그녀를 주체로 두고 봤을 땐 결코 행복하지 않아보인다. 오히려 불행으로 점철된 삶 같다. 나는 그녀의 삶을 옹호하지 않는다. 나 뿐만 아니라, 감상자 모두는 나나의 삶과 그녀의 행태에 동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나는, 제목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바라던 삶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우리는(나나 역시) 깨닫지 못한다. 그녀의 안타까운 삶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현실에 처한 자신을 '직시'해야만 한다. <비브르 사 비>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 중 한 명의 삶을 '직시시킴'으로써 냉혹한 현실과 그 위에 선 인간을 보여준다. 자아와 상황의 변화는 비단 나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의 삶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감상자들에게 성찰과 다짐의 기회를 제공한다.



[덧]

나는 12장의 챕터 중, 중년 남자와의 철학 얘기를 나누는 11장이 좋았다. 남자가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배울거리'가 많은 시퀀스다. 남자와 나나의 대화를 옮겨보겠다.


'생각과 말(표현)의 일관성'

나나: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은 거예요?

남자: 그렇게 믿고 있어. 플라톤은 그렇게 말했어. '그건 옛 이데아다'. 사람은 표현하고자 할 때 단어에서 생각을 구별해낼 수 없어. 생각하는 그 순간은 단어를 통해서만 잡을 수 있어. 거짓도 우리 탐구분야지. 오류와 거짓은 아주 비슷해. 올바른 방법으로 말을 하게 되면 상처를 주지 않지.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하고 하고자 하는 걸 하는 거야. 상처나 흉터 없이 말이야.


'진리와 오류'

나나: 누가 저한테 '진리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오류 속에도' 라고 말했어요.

남자: 사실이야. 프랑스 사람들은 17세기 동안 그걸 보지 못했어. 오류를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오류가 많을수록 진리 속에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지. 그건 불가능해.


'사랑'

나나: 사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남자: 사랑 속에는 육체라는 것이 들어가야 했어. 우연한 진리와 필요한 진리가 인생을 구성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관리해야 했지. 그건 사실이야. 사랑하는 것을 그 즉시 바로 아는 사람을 본 적 있소? 당신은 임의로 선택을 해야 돼. 당신이 말하는 '난 사랑해요'라는 건 불순한 사건이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완전하게 되려면, 당신은 성숙이 필요하오. 그건 탐구를 의미하는 거지. 이게 인생의 진리요. 그래야, 사랑은 해결이 되고 사랑이 진실인 상태가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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