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슬픔이 주는 기쁨> 중에서
이번 글은, 책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의 마지막 두 챕터 '글쓰기(와 송어)', '희극'에 대한 것이다. 두 챕터는 각각 작가(책)의 가치와 만화가(만화, 유머)의 가치를 설명한다.
먼저, '글쓰기(와 송어)'에서 필자가 인상깊게 읽은 부분을 옮겨보겠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그 다양성 속에서는 '나의 삶'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수한 상황을 우연(혹은 계획)적으로 만나게 되지만, 그 상황을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글로써 그 상황들을 기록하고 싶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한데, 우리가 어떠한 책을 접할 땐, '신기하게도' '나의 경험을 그대로(아니, 그 이상으로 상세하게)' 표현한 글을 만나볼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작가와 나는 일면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을 나눈다. 책을 통한 소통이다. 작가는 글로썬 나의 삶을 표현해냈고, 나는 그 표현력에 감탄한다. 이것의 '책의 힘'이자, '작가의 역량'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도 '무릎을 탁 친' 나는, 그래서 그를 좋아한다.
다음은, '희극'에서 공감한 글들이다. 이 챕터에서 다뤄지는 건 유머와 만화 등이다.
'만일 유머가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면 루이필리프는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인식한 대로,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오만, 잔혹, 허세 등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벗어난 것들을 비판하는 방법인 것이다. 농담이 비판에 특별히 효과적인 것은,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는 권력의 불의와 더불어 사회 체제에서 우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을 향한 우리의 지나친 선망도 교정하려 한다. 만화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가장 딱하게 느껴지는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한다.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화와 유머를 즐긴다. 심지어, 중독된 사람들도 더러 있다. 희극들을 즐기는 목적을 단순히 오락성에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품을 감상한 후에는 단순히 유희성만 남는 건 아니다. 유희성이 전면을 장식하지만, 깊은 곳에는 '교훈'이 있다. 오히려 희극들은, '고도의 교훈성을 지닌 작품'들이다. 조롱으로 사회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비판받아 마땅할 현실을 '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추락시킨다. 이것이 희극작가들이 지닌 고도의 역량(천재성)이다. 진지한 사안을 진지하게만 그려내는 것보다, 그것과 반대되는 관점으로 보여줄 때 우리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 이상함은 의구심으로 이어지고, 사안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진짜 중요한 사안'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희극의 '겉'은 아이들조차 순진무구하게 즐길 정도로 '포장'되어있다. 따라서, 검열도 제법 쉽게 통과될 수 있다. 같은 사안을 희극적으로 풀어내게 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작품'이 된다. 이것이 '희극의 기술'이다.
위 두 챕터는, '글'과 관련된 것들로 볼 수 있다. 훌륭한 작가는 냉철한 시선을 지닌 묘사력으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역량과 위트를 갖춰야 한다. 드 보통은 그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글 뿐만 아니라, 여행과 예술, 사회적인 문제 곳곳을 탐구하려는 자세가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건,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